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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 2011. 12. 25. 01:25

셜존 :: All I want for christmas is U





 주말에 찾아올 크리스마스를 앞둔 월요일 저녁이었다. 카트를 끌고 색색의 푸딩이 쌓여있는 식품 코너와 냉동 칠면조를 지나치는 데는 평소보다 긴 시간이 걸렸다.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이 과하게 많아서였다. 심지어 인스턴트식품 코너에조차도 사람들을 헤치며 카트를 밀어야 했을 정도로 마트 안은 혼잡했다. 야근을 하는 사라를 대신해서 저녁 장을 보러 나온 존은, 스튜 가루와 냉동 닭가슴살과 샐러드거리 조금을 집는데 이십여 분을 소비한 것에 넌더리를 내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사람들이 빚어내는 체증과 혼란 속에서 존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시계를 보았다. 일곱 시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포인세티아와 붉은 구슬로 장식해 놓은 마트 안의 크리스마스 특별 코너를 좀 더 구경하고 싶었지만, 늦기 전에 어서 집에 돌아가 저녁 준비를 해야 했다. 연말이라 병원은 평소보다 한가했지만 사라는 언제나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산더미같이 쌓여가는 서류들을 훑어보느라 늦게까지 남아 있곤 했다.

 존이 그녀의 집에서 얹혀살게 된 지도 어느덧 두 해째를 향해 가고 있었다. 함께 맞이하는 크리스마스도 이번이 두 번째였다. 작년에는 미처 아무 것도 챙기지 못해 사라의 집에서 간소하게 차린 저녁식사를 함께 했을 뿐이지만, 올해는 다를 것이다. 템즈강의 밤 풍경을 내려다보며 분위기 있는 음악과 함께 멋진 저녁식사를 할 수 있는 레스토랑을 예약해 두었기 때문이었다. 한 달 전, 레스토랑의 크리스마스 특별 예약 개시일에 핸드폰을 붙잡고 아침부터 애썼던 기억을 떠올리며 존은 미소 지었다. 아직 그 얘기는 꺼내지 않았지만, 분명 그녀도 기뻐할 터였다.

 사람들이 벌떼같이 모여든 주류 특별 세일 코너를 지나치며 존은 힘껏 카트를 밀었다. 그런 그의 걸음걸이 속도가 줄어든 건 벽난로에 걸 빨간 양말들과 트리 장식들이 늘어서 있는 코너에 맞닥뜨렸을 때뿐이었다. 아이를 앞세운 부모들이 즐거운 표정으로 구슬과 사탕 막대와 웃음이 과한 뚱보 산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때마침 빙 크로스비가 부르는 캐롤이 마트 안을 가득 채웠다. 음악이 주는 아련함이 귓가에 스쳤다. 존은 자신의 키만한 전나무 앞에 잠시 멈추어 섰다. 벌거벗은 초록 플라스틱 나무는 그에게 언젠가 나누었던 어떤 대화를 상기시켰다. 자신의 유년 시절의 고백과 그에 관해 위로 아닌 위로로, 작은 크리스마스 트리를 허락하던 남자를. 씁쓸한 미소가 입에 걸렸다.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은 시도 때도 없이 그렇게 찾아온다. 그러나 벗어나기 위해 존은 능숙하게 카트를 회전시켜 계산대로 향했다. 때마침 자켓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위잉하고 울었다. 속도가 붙은 카트를 멈춰 세우려다가 잽싸게 끼어든 한 남자의 다리에 부딪치고 말았다. “미안합니다.” 깜짝 놀라 남자에게 사과하자 그는 괜찮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바삐 걸음을 옮겼다. 핸드폰을 꺼내 보니 문자메시지가 와 있었다.

- 저녁 준비는 잘 돼가요, 존? 한 시간 뒤면 끝날 것 같아요. 이따 봐요.

 사라였다. 존의 얼굴에서 씁쓸함이 걷히고 작은 미소가 걸렸다. 마.트.예.요. 이따. 봐. 요... 또각또각 글자들을 누르고 전송 버튼으로 마무리하려던 문장들이 갑자기 쏟아진 새로운 문자에 가려졌다. 미간을 찌푸린 존은 발신인을 볼 틈도 없이 눌러버린 문자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액정에 집중했다. 그리고 한참 동안 못 박은 듯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빼곡히 길을 메우며 지나가는 사람들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존의 카트를 피해 이리저리 움직였다. 묵직하던 캐롤은 어느새 발랄한 목소리의 머라이어 캐리의 노래로 바뀌었다. 그녀는 새된 목소리로 양말도 트리 아래 선물도 필요 없다고 외치고 있었다. 이윽고 그를 중심으로 심각한 교통 체증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계산대로 향하던 사람들의 비난에 가까운 불평이 쏟아져 나왔지만, 듣지 못한 것처럼 여전히 존은 움직이지 않았다. 단 한 줄의 메시지를 담은, 핸드폰 액정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 All I want for Christmas is U ..





 데자부로군. 존은 바로 곁에 앉아 있는 인상 좋아 보이는 사내의 옆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다른 게 있다면 그때는 자신이 다리를 절고 있었고, 살 집을 구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으며, 날씨도 이렇게까지 춥지 않았다는 것 등등이었다. 굳이 찬바람을 맞으며 스탬포드와 존은 바솔로뮤 병원 연구실 앞의 벤치에 앉아, 오래전 그들이 공원에서 그랬던 것처럼 커피를 손에 들고 시린 손을 녹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부분은 별 쓸모없는 내용이었다. 안부와, 지나간 과거와, 해야 하지만 결코 하지 않을 계획에 대한 이야기들.

 아프가니스탄에서 돌아와 재회한 뒤에도 그리 자주 연락을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운영하던 블로그를 닫은 뒤로는 그나마 남아있던 접점마저 끊어져 스탬포드와 다시 만날 생각 같은 건 해 본 적도 없었다. 만약 존이 병원 점심시간에 짬을 내어 바솔로뮤에 찾아가지 않았더라면 두 사람이 이렇게 앉아 함께 커피를 마실 일은 영원히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커피를 들이마시던 사내는 존이 멍하니 앉아 있는 것을 보곤 급히 안색을 바꾸었다. “존, 어- 그러니까, 자네 괜찮나?” 스탬포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제야 존은 과거에 빠져 현재를 놓치는 바람에 친구에게 걱정을 끼쳤음을 깨닫고 애써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물론이지.” 얼마 전부터 존은 셜록과 자신을 알던 사람들이 자신에게 괜찮냐고 묻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괜찮지 않더라도, 괜찮다고 대답하는 것에도.

 손수건으로 입을 닦으며 스탬포드가 말했다. “어쨌든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야. 사실 걱정했거든. 그러니까... 작년에 그 일이 있은 후로-”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던 존은 웃으며 말을 자르려는 듯 손을 들어 보였다. “그래. 걱정 말아, 난 정말 괜찮으니까. 그냥, 지나가던 길에 자네 생각이 나서- 어떻게 지내나 궁금해서 들러 본 것뿐이야. 건강해 보여 다행이로군.” 거짓말이었다. 존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겨울바람에 메마른 나무들로 빈 시선을 두었다. 근처에도 가지 않던 바솔로뮤 병원을 찾아온 건, 오로지 그 남자 때문이었다. 스탬포드가 안내한 연구실에서 홀로 현미경을 들여다보고 있던 남자. 자신을 셜록 홈즈라고 소개한 남자.

 낮이라 켜두지 않은 전구들이 나무들을 검은 뿌리처럼 움켜쥐고 있었다. 비단, 나무들 뿐 아니라 밖의 풍경들은 어딜 가나 밝고 붉고 푸른 것들 일색이었다. 그래. 곧 크리스마스니까. 트리와, 칠면조와, 장식용 산타들이 넘쳐나겠지. 멋진 레스토랑에서 사라와 함께 할 최고의 저녁 데이트를 떠올리며 존은 침잠하려는 기분을 애써 끌어올렸다. 그러나 생각은 꼬리를 물고 이어져, 셜록이 작은 트리를 놓는 것을 허락했음에도 불구하고 베이커가에서는 한 번도 함께 크리스마스를 맞이한 적이 없었다는 아쉬움에까지 도달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런던으로 돌아와 셜록을 만난 후 잠시 베이커가에서 살았지만 그것은 단 몇 달뿐이었고, 그 해 크리스마스를 보낸 장소는 사라의 집에서였다. 그녀가 없었다면 어쩌면 존은 베이커가에서 홀로 쓸쓸히 크리스마스를 보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건 정말이지 생각하기도 싫었다.

 그러다 한숨을 쉬며 존은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어느 쪽이? 셜록이 없는 크리스마스가? 아니면 그저 홀로 보내는 크리스마스가? 어느 쪽이건 괴롭기는 마찬가지였다. 셜록이 없는 베이커가의 하숙집에서, 죽은 친구와 함께 했던 시간을 홀로 되새기는 것은.

 생각에 잠겨있던 존은, 맞은편의 침울한 시선을 느끼곤 또다시 애써 환하게 미소 지으며 스탬포드에게 물었다. “자네 부인은 잘 지내나? 크리스마스는 둘이 뭘 하며 지낼 생각이지?”



*



 일 년 하고도 팔 개월쯤 전에 죽은 친우를 떠올리는 것은 이제 그리 슬프지 않았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옛 말들은 하나 틀린 것 없었지만, 존은 마음에서 멀어진다고 해서 그 무게마저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를 떠올릴 때마다, 존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을 정도로 즐거워졌으며,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여전히 저도 모르게 흥분하곤 했지만, 이윽고 그 독특하고 날카로운데다 다소 예의가 없지만 매력적이었던 친구가 더 이상 자신의 곁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할 때면 마음은 이내 납덩이를 삼킨 것처럼 무거워졌다. 그것은 다시 꺼낼 수 없을 정도로 깊이깊이 가라앉아 늘 그 자리에 있었다. 셜록 홈즈. 결코 잊을 수 없는 단 하나의 이름으로.

 이미 전장에서든 병원에서든 수많은 죽음을 지켜보았던 존은, 그 죽음이라는 것이 종류에 따라 상관없이, 언제 어디서든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 들이냐는 것이었다. 바이러스가 아닐진대 죽음에 대해 면역이 있다고 표현하는 것은 어찌 보면 우스운 일이지만, 전쟁터에도 있었던 존은 제가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죽은 친구를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아파오는 것까지는 어찌하지 못했다.

 점심시간에 스탬포드를 핑계로 바솔로뮤에 찾아갔던 것처럼, 그 다음날에도 존은 마찬가지로 사라에게 양해를 구하고 시간을 내어 힉맨 갤러리로 향했다. 굳이 그 장소들이 주는 공통점들을 생각한다면 다른 많은 곳, 이를테면 차이나타운이나 웨스트 켄징턴 도서관 같은 곳도 있겠지만 굳이 그 곳으로 향한 이유는 간단했다. 그나마 병원에서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존이 런던에서 대학을 다니는 동안 알게 된 장소들보다, 우습게도 셜록과 함께 한 몇 개월 동안 새롭게 알게 된 장소들이 더 많았다. 그러나 셜록이 죽은 뒤 일부러 그곳들을 다시 찾은 적은 없었다. 별로 내키지 않아서였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존은 지금 자신이 갑작스럽게 벌이고 있는 목적 없는 행보에 붙일 이름으로, ‘죽은 친구와 함께 했던 장소와 추억을 되새기기 위한 여정’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 위험할 수도 있지만, 괜찮다면 베이커가로 와요.

 공원 입구가 보이는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선 존은, 핸드폰을 열어 가만히 문자 메시지를 들여다보았다. 짧지만 강렬한 그 문장은 다시금 존의 심장을 쿵쿵 두들겼다. 익숙한 메시지. 그건 셜록이 처음 그와 만났던 날 보낸 메시지와 닮아 있었지만, 그날의 것이 아니었다. 존은 마트 안에서 자신에게 온 메시지를 보았을 때 받은 충격을 잊을 수가 없었다. 발신인은 셜록의 핸드폰 번호였다. 믿을 수 없어하며 존은 곧바로 되걸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그저 누군가의 장난이라 치부하기엔 너무 악질적이었다. 그리고 그 문장- 셜록이 존에게 보냈던, 그 메시지를, 두 사람이 아닌 다른 누가 또 안단 말인가? 텅텅 비어 꾸르륵 소리가 나는 콜라 컵을 구기며, 존은 미간을 찌푸렸다. 물론 존은, 그 문자를 받았을 땐 너무 놀라 베이커가 까지 달려갈 뻔했지만, 하루가 지나고 나자 이성이 그를 일깨웠다. 그래서 지금은 죽은 셜록이 그 메시지를 보낸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정도로 제정신으로 돌아와 있는 상태였다.

 간단히 배를 채우려고 산 샌드위치는 만든 지 오래 되었는지 버적히 말라 입 안에서 종이처럼 씹혔다. 가로지른 공원 쓰레기통에 콜라 컵과 포장지를 내버리니 이윽고 눈앞에 갤러리의 모습이 나타났다. 가짜 그림 소동으로 떠들썩한 뉴스가 나온 지도 이미 이 년에 가까워 있었다. 잊어버리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힉맨 갤러리의 오명은 점차 지워지고 있을 것이다. 횡단보도를 건너 마주한 입구에는 어느 미술가의 이름이 커다랗게 새겨진 포스터가 걸려 있었다.

 존은 그림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그 미술가가 현대 미술을 하는 사람인지 옛 화가인지도 알지 못했다. 누구 말마따나 그쪽은 관심사가 아니었으니까. 셜록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셜록이 존과 다른 점은, 필요에 의해서라면 하룻밤 만에 미술의 역사 같은 걸 통째로 외우거나 응용해서 찾아낼 수 있는 놀라운 하드디스크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것조차 모르던 그가 존은 생각지도 못한 초신성의 이름 같은 걸 알아내는 걸 바로 눈앞에서 목격하지 않았는가.

 추억을 돌이키며 존은 쓰게 웃었다. 자신은 절대 이 런던에서, 아니, 어디를 가든 결코 그를 잊지 못하리라. 당시 느꼈던 흥분과 쾌감, 범죄자에 대한 분노는 존과 같은 보통 사람이라면 쉽게 잊을 수 있는 류의 것들이 아니었다.



 갤러리의 로비에 세워져 있는, 천장까지 닿을 듯한 커다란 크리스마스 트리는 일반적인 플라스틱이 아닌 나무토막과 낡은 TV를 트리 모양으로 쌓아 만든 조형물이었다. 그 앞에 잠시 머물러 번쩍이는 브라운관과 그 안에서 초단위로 비치는 붉은 포인세티아를 바라보던 존은 몸을 돌려 제 1 전시관으로 향했다. 점심시간이었지만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맞이하는 따스한 공기에 몸을 부르르 떨며 존은 친절한 미소를 가진 검은 정장차림의 안내원에게 미소를 보였다. 그녀의 머리색은 사라의 것과 닮아 있었다. 밝은 갈색의. 그러나 그 뿐, 얼마 못 가 그녀에게도 흥미를 잃은 존은 뒷짐을 지고 텅 빈 전시관을 둘러보며 이번 전시회의 화가는 별로 유명하지 않은가 보다고 생각했다.

 벽에 걸린 사각 프레임 속엔 알 수 없는 표식들만 가득했다. 정물화도, 풍경화도 아닌 획과 면, 색들이 구현해내는 공간을 설명도 없이 이해하기란 너무 어려웠다. 베이커가에 걸려 있던 그림이라곤 셜록이 가져온 어느 남자의 초상화와 해골 무늬 액자뿐이었다는 걸 고려해 볼 때,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건 그리 중요하지 않았기에 곁눈질로 훑듯이 그림들을 지나쳤다. 어쩌면 셜록은, 자신과 달리 붓질이 만들어낸 세밀한 결들을 본 것만으로 이 그림을 그린 화가의 심리상태를 파악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리고는 잘난 척 떠들어대겠지. 없는 친구를 생각하며 존은 작게 웃었다.

 지친 다리를 이끌고 전시관에 있는 가로로 긴 의자에 앉은 존은 드문드문 지나가는 사람들을 관찰했다. 사람들은 홀로 혹은 둘 셋이 짝을 지어 바삐 오갔다. 한낮에 그림을 구경하러 오는 만큼, 여유가 넘치는 모습들이었다. 애썼지만 셜록과 달리 존은 그들의 모습에서 그 이상의 것은 추리해낼 수 없었다. 그리고 그가 바라는 모습의 남자도 발견할 수 없었다. 존은 제가 미련한 짓을 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삼십 분이 지나고 한 시간이 지나 손가락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서른 명 째 꼽았을 때, 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셜록은 나타나지 않았다. 존은 작게 웃었다.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한 거지?

 셜록이 자신을 찾기 위해 나타나지 않았다. 그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죽었으니까.

 존이 바츠에 이어 이곳에 찾아 온 이유는 셜록의 생사와는 상관없이 그저 셜록과의 추억을 오랜만에 끄집어내기 위함이었을 뿐이다. 존이 그렇게 이름 붙이고 싶어 하지 않았더라도, 어떻게든 존의 행동은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을 터였다. 갑자기 날아온 문자 한 통이 과거의 기억에 불을 당기는 도화선과 같았노라고.

 그러나 바츠에 이어 이곳에 찾아오면서, 존은 자신이 혹시나 하는 희망들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건 그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리에 서서 머리를 쥐어뜯고 싶을 정도로. 모든게 다 그 문자 때문이었다.

 그는 아직도- 셜록이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다는 것이, 그런 자신이, 부끄러웠다.

 존은 주머니 속에 든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한 편에 숨어있던 논리가 그의 정신을 들게 만들었다. 그래. 이건 정말 말도 안 되었다. 만약 그가 살아 있었다면, 이런 식으로 문자를 보내기보다, 메일을 보내거나 전화를 해서 자신의 생존을 알리는 편이 훨씬 빨랐을 것이었다. 셜록이라면, 존 그 자신이 여전히 런던에 남아 있으면서 생각날 때마다 베이커가의 하숙집이 보이는 곳에서 가끔씩 그 창문들을 올려다본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을 테니 말이다. 존은 추억을 그리워하는 일에 이제 넌덜머리가 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과거는 쫒을수록 쉽게 멀어졌다.

 돌아가기 위해 출구를 향해 몸을 돌리던 존은 동시에 저쪽, 출구 옆 천장에서 반짝이는 카메라와 눈이 마주쳤다. 그것은 마치 먹잇감을 노리듯, 차가운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존은 저도 모르게 굳어진 얼굴로 한참동안 그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마이크로프트. 소리 없이 달싹이는 입은 또 다른 홈즈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뱅글뱅글 돌아가는 천정의 격자무늬가 제 모습을 찾고 나자,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모르지만 석상처럼 소파에 앉아 생각에 잠긴 마이크로프트가 존의 시야에 들어왔다. 자신이 누워있는 곳이 병원이라는 걸 깨닫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익숙한 소독약 냄새와 링거병이 그를 감싸고 있었다. 존이 정신을 차렸다는 것을 뒤늦게 안 마이크로프트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늘 들고 다니는 우산은 곁에 없었다. 그건 존을 불안하게 했다. 마치 모리어티가 그를 위해 마련한 폭탄 조끼를 입혔을 때만큼이나 그랬다. 존은 입을 열었지만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모래가 잔뜩 끼인 것처럼, 목구멍에서는 자글자글한 소리가 났다. 그러자 마이크로프트가 그를 저지했다.

“무리하지 말아요, 존. 당신은 이틀 만에 깨어났어요.”

 마이크로프트가 전하는 사실에 존은 무척이나 놀랐다. 셜록은요? 셜록은 어디 있죠? 말 대신 쇳소리가 나오는 입모양을 보며 난처해하는 마이크로프트의 얼굴은 존을 더욱 불안하게 했다.

“존, 애석하지만 당신에게 해야 할 말이 있어요. 셜록은...”

 그건 동생을 잃은 자의 얼굴 치고는 지나치게 침착했다. 그래서 존은 그 다음 말이 그런 내용이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죽었습니다. 어젯밤에.”

 동시에 존은 고막을 찢을 듯 강타하는 엄청난 폭발음을 들었다. 쏟아지는 차가운 물과, 자신을 단단히 붙잡고 있는 남자가 피어내는 붉은 물결 속에서 미동도 하지 못하고 그렇게 가라앉던 순간의. 어느 것이 먼저였는지 모른다. 폭탄이 터진 것과, 셜록이 자신을 붙들고 수영장 안으로 뛰어든 것 중에.

 그러나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존은 눈을 떴다. 전시관의 출구 옆에 자리한 CCTV 카메라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존은 핸드폰을 꺼내 마이크로프트의 이름을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 이름은 여전히 자신의 핸드폰 속에 있었고 존은 자신이 그의 이름을 지우지 않았다는 것에 별로 놀라지 않았다. 셜록의 핸드폰 번호도 아직 저장되어 있었으니까. 그와 나눈 메시지도 전부. 핸드폰을 귓가에 가져다대자 신호음이 갔다. 존은 메마른 입을 적시기 위해 마른 침을 삼켰다. 세 번인가 네 번쯤 신호음이 울렸을 때, 저 쪽에서 정장을 입은 안내원이 손을 내저으며 자신을 향해 잰 걸음으로 다가왔다. “미안하지만, 통화는 전시관 밖 로비에서 부탁드립니다.” 입술을 깨물며 사과를 하고 핸드폰의 종료 버튼을 누른 존은 갤러리를 나왔다. 뒤늦게 자신이 왜 전화를 걸었는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 생각하려 했지만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혹시 셜록이 살아있는 게 아니냐고 물어야 할까? 존은 실없이 웃었다. 그건 분명 마이크로프트를 당혹스럽게 할 것이다. 존의 기분이 재차 바닥으로 추락했다. 싸늘한 겨울바람이 뺨을 스쳤고 얼마 못 가 손 안에서 부르르 떠는 진동이 느껴졌다. 마이크로프트? 급격히 심장이 뛰는 것을 느끼며 존은 반짝이는 액정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기대한 것과 달리, 그건 마이크로프트가 아니었다.

“사라, 미안해요. 곧 병원에 들어갈 거예요. 점심 먹었어요?”

 존은 흰 입김을 내뿜으며 횡단보도로 향했다. 손 안에 든 핸드폰에서는 걱정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품었던 기대와 의심들이 사라지고, 갑자기 모든 것이 현실로 돌아왔다.

 그래, 셜록은 죽었다. 이 년 전, 수영장에서 있었던 모리어티와의 대결에서, 폐를 관통하는 총상을 입고 과다출혈로 인해. 마이크로프트가 설명해준 그의 사인이었다. 존은 셜록의 장례식에도 가지 못했다. 그가 어디에 묻혔는지도 알지 못했다. 홀로 베이커가에 돌아온 존은 매일 밤 악몽에 시달렸다. 참다못한 그가 셜록의 무덤이 있는 곳을 알려달라고, 전화를 걸어 거의 애원조로 말했을 때, 마이크로프트는 단호한 말투로 더 이상 그에 대해 관여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대답했다. 지금까지 자신이 방세를 대신 부담해왔지만, 원하지 않는다면 그 집이 아닌 다른 곳으로 떠나도 좋다고도 말했다. 그래서 존은 베이커가를 나왔다.

 그것이 존이 사라와 함께 보낼 크리스마스 이브의 저녁 식사를 설계하는 이유였다.

 만약 그가 살아 있었다면, 존은 여전히 셜록과 함께였을 것이다. 일 년이든, 이 년이든.
 어쩌면 영원이든.

“사라, 크리스마스 이브에 근사한 레스토랑을 예약해 놨어요. 기대해도 좋아요.”

 셜록의 빈자리엔 어느덧 사라라는 여인이 함께하고 있었고, 그건 그리 나쁘지 않았다. 비록 그녀가 셜록이란 이름이 주는 상실감을 모두 메우지 못할 지라도. 기뻐하는 사라의 웃음소리가 남기는 여운을 느끼며 존은 전화를 끊었다. 셜록이 죽고 난 뒤 그와 함께했던 순간들이 모두 삶의 한 편으로 밀려났지만, 그건 미처 셜록의 죽음을 막지 못했던 것처럼, 존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는 그렇게 변명했다. 셜록, 이건 다 자네 때문이야. 자네가 날 이렇게 두고 갔으니까. 안 그런가? 내가 홀로 크리스마스를 보내지 않는다고 해서 원망하면 안 되네. 난 한 번도 날 두고 가버린 자네를 원망한 적이 없다는 걸, 자네도 잘 알겠지.

 횡단보도의 신호가 빨간 색에서 파란 색으로 바뀌었다. 존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은 채 가만히 기다렸다. 마이크로프트에게서 전화는 오지 않았다.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병원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존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의 대답을 들으려는 것처럼. 머물러 있던 입가의 미소가 바람에 녹아 점차 옅어졌다. 깜박이던 파란 빛은 다시 붉게 변했고, 멈춰 섰던 차들은 부지런히 달려갔다. 존은 가만히 서서 크리스마스 트리에 달린 전구처럼 아른거리는 붉은 신호등을 바라보았다.




*




“셜록, 보통 크리스마스엔 뭘 하며 지냈나?”

 존이 물었던 건 문득 마이크로프트가 그에게 해준 이야기가 생각나서였다. 홈즈가의 크리스마스 디너가 어떨지 솔직히 상상은 가지만, 존은 기왕이면 직접 듣고 싶었다. 그러나 돌아온 건 제정신이냐는 반응이었다. “크리스마스? 존, 지금은 1월인데. 설마 벌써부터 크리스마스가 기다려진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가.” 현미경에서 눈을 떼지 않는 셜록의 정수리를 매섭게 내려다보며 존이 대꾸했다. “아니, 당연히 아니야. 셜록, 그냥 궁금해서 묻는 거네.” 다분히 순수한 의도로 묻는 것이라는 걸 가장해야 했지만, 셜록과 평범한 대화를 이어나가려면 꽤 많은 정신적 노동이 필요했기에 존은 짜증이 났다. 아랑곳 않고 셜록은 생각만 해도 지루하다는 말투로 이야기했다.

 “변명하지 않아도 돼. 마이크로프트가 자네에게 이야기했겠지. 그는 누구에게나 내 태도를 비난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사람처럼 군다니까. 크리스마스 디너 얘기는 그가 늘 써먹는 소재고.” 정곡을 찔린 존은 어깨를 으쓱였다. 셜록은 그런 존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늘어지게 말을 이었다. “크리스마스라. 당연히 칠면조와, 푸딩과, 트리와, 산타...” 존은 이 부분에서 어이없어 하며 그런 거 말고, 라는 표정을 지었고 마침 그를 본 셜록은 항의의 뜻으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오, 설마 자네, 내가 보내는 크리스마스엔 뭔가 더 특별한 게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뻔뻔스런 표정으로 셜록이 존을 비난하듯 노려보았다. 자기 전 마실 홍차를 끓이던 존은 머그잔을 손에 든 채 굴하지 않고 셜록에게 입을 삐죽였다. “루돌프를 이끌고 채찍을 휘두르는 살찐 남자보단 살인범이나 시신 쪽이 자네 취향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라서 말이야.” 그러자 셜록이 낮게 웃었다. 마주 웃어주며 존은 다 끓은 홍차를 들고 셜록이 앉은 식탁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셜록에게 머그컵을 건네자, 그는 고맙다는 말도 없이 그것을 받아 제 옆에 놓았다.

 크리스마스에 대한 이야기가 듣고 싶어 먼저 말을 꺼냈지만, 존 스스로도 그 특별한 날에 대해서는 좋은 기억이 별로 없었다. 그 사실을 고백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셜록이 던지듯이 내뱉었다.

“딱히 특별할 것도 없는 날이지. 왜 그렇게 흥분하는지 알 수가 없다니까.”

 셜록의 반응에 존은 정말이지 그답다고 생각했다. 어느 정도는 그의 말에 동의하면서.

“그래. 하지만 마이크로프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던데.”
“흥, 그는 어머니의 마음의 평안을 위해서라면 산타를 잡아서라도 갖다 바칠 위인이니까.”
“자넨 아닌가?”

 그러자 셜록은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럴 줄 알았다. 존은 홍차를 한 모금 마시며 그가 부럽다는 듯 말했다.

“그래도 함께 모일 가족이 있다는 건 좋은 거잖아. 우리 집은 어릴 때부터 그런 거랑은 거리가 멀었거든. 부모님은 이혼하는 날까지 매일 싸우기에 바빴으니까. 단란한 가족 식사라던가, 함께 놀러간다거나, 선물을 주고받는 건 생각지도 못했어. 난 어릴 때 트리를 꾸며보는 게 소원일 정도였지. 나와 달리 해리엇은 자네처럼 그런 반짝이고- 아름다운 것들에 관심이 없었지만.”

 짐짓 태연한 척 했지만 존은 자신이 누군가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 처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유년의 기억에 새삼 불만이나 열등의식을 갖는 건 아니지만, 좋았던 날들이라고 생각해 버리기에는 존이 아직 많은 것들을 용서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대수롭지 않은 것들로 치부하는데 일가견이 있는 셜록이라면 자신의 그런 이야기도 별 거 아니라는 식으로 얘기할 거라고 예상했고, 그건 어느 정도 존이 바라는 바였다. 그러나 셜록은 찌푸린 미간으로 식탁의 어느 한 지점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이를 악무는 것 같은 소리를 내 존을 폭소케 했다.

“아아, 트리라. 아주 오래 전에 마이크로프트가 트리에 별 대신 나를 매달려고 했던 일이 떠오르는군. 지금 생각해도 정말 끔찍했지.”

 하마터면 입에 머금고 있던 홍차를 뿜을 뻔한 존은 어째서냐고 물으려 했지만 쿨럭거리는 바람에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셜록은 한심스럽다는 듯 존을 보며 말했다. “가장 좋아하는 걸 달으라기에 내가 해골 모형을 트리에 매달려고 했거든. 그 때 마이크로프트의 표정이 굳어지는 걸 자네가 봤어야 하는데.” 결국 참지 못한 존은 배를 잡고 낄낄거렸고 셜록은 옅은 미소로 그의 즐거움을 방관했다. 한참동안 웃음을 그치지 못하던 존이 입을 다문 건 셜록의 의외의 말 때문이었다.

“자네가 원한다면 다음 크리스마스에는 이 방에 트리를 놓아도 상관없어. 이왕이면 마이크로프트가 나를 트리에 매달 수 없을 만큼 작은 거라면 더 좋겠군.”




*




 어두운 밤이 찾아오자 더욱 화려해진, 노섬벌랜드가에 위치한 안젤로의 레스토랑을 지나치며 존은 셜록과 자주 앉았던 창가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연인들을 향해 미소 지었다. 그들은 무척 행복해 보였다. 내일, 사라와 마주 앉을 자신들도 저렇게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다고 존은 생각했다.

 크리스마스 이브 전날, 오후 타임이 비게 되자 그는 마지막으로 차이나타운과 트라팔가 광장, 도서관과 박물관 등을 둘러보았다. 한 번 떠올리자 기억은 그리움을 동반한 채 꼬리에 꼬리를 물고 따라왔다. 존은 굳이 그 장소들이, 셜록을 잃고 난 뒤 그와의 추억들로 조금 슬프게 점철되는 것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셜록과 함께 했을 땐 어디든 범죄가 만연했고, 착한 사람들이 있으면 그만큼 나쁜 사람들을 만났다. 그러나 이제 그 모든 건 추억으로 남았고 도시가 뿜어내는 비명과 눈물은 존과 아무런 상관이 없어졌다. 때로 그는, 자신이 잠시간 꿈을 꾼 게 아닌가 하는 생각조차 했다. 꿈은 다시 꾸지 못한다는 점에서 베이커가에서 지낸 시간들을 비유하기 좋았다. 이젠 돌이킬 수 없을 시간들.

 어느덧 해가 져 가고 있었고 오늘 밤이 지나면 이 여정도 끝이 날 것이다. 시발점은 셜록의 이름을 딴 알 수 없는 메시지 하나였지만, 그동안 존은 자신이 무엇을 위해 셜록의 흔적을 찾았던가를 고민했고, 답도 없이 고민하면서도 여전히 기억속의 그를 찾아 다녔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이 확실해졌다. 존은, 이제 그만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었다. 밤마다 수영장의 악몽을 꾸지 않고, 문득 떠오르는 그의 이름에도 가슴아파하지 않도록. 죽음을 경험한 적이 있는 모든 이들은 하나같이 시간이 해결해 줄 일이라고 말했었지만, 그건 존이 셜록을 놓았을 때에나 가능한 이야기였다.

 존이 선택한 여정의 마지막 장소는 베이커가의 221b번지였다.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존은 핸드폰을 열어 메시지함을 확인했다. 사라와 나눈 대화들 속에서 아직 자리하고 있는 사흘 전의 메시지를 불러오니, 당시 느꼈던 심장이 떨어질 것 같은 기분은 이미 사라지고 대신 아련한 기분만이 남았다.

- 위험할 수도 있지만, 괜찮다면 베이커가로 와요.

 잠시 화면을 들여다보던 존은, 망설이지 않고 버튼을 눌러 조용히 그 메시지를 삭제했다. 그동안 그를 괴롭히던 문장은 단 1초도 지나지 않아 공중으로 흩어졌다. 고개를 드니 어느새 저 멀리 베이커가의 익숙한 건물 끄트머리가 보였다. 시간은 이미 저녁 7시를 지나, 거리는 집으로 향하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자신도 이제 곧 베이커가에 미련을 남겨두고 사라가 있는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존은 부디 스스로를 얽매는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바랐다.

 베이커가를 두 블록 남겨놓은 횡단보도에 멈추어 서니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사라의 메시지였다. 몇 시쯤 올 거예요? 존은 답장 버튼을 눌렀고, 동시에 신호등은 파란불로 바뀌었다. 스치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피해 조심스럽게 한 자 한 자 글자를 누르던 존은, 횡단보도의 끄트머리에서 새로운 메시지를 받게 되었다. 메시지 작성을 방해하는 손 안의 진동에 신경질을 내던 그는 발신자의 이름을 보고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 위험할 수도 있지만, 괜찮다면 베이커가로 와요.

 고개를 들자 존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건너편 사거리 신호등 위의 CCTV 카메라였다. 마치 어디선가 존이 그 메시지를 지우는 것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한 번이라면 우연이나 장난으로 치부할 수 있겠지만, 두 번째로 똑같은 메시지가 같은 발신인으로부터 도착했다는 사실은 그를 혼란케 했다. 그러나 오히려 그 사실이 이번에는 좀 더 명확한, 단 하나의 결론으로 그를 몰았다. 그의 심장이 가파르게 뛰기 시작하자, 망설임 없이 존은 주머니 속에 핸드폰을 넣고 사람들을 밀치며 달려 나갔다.

 말도 안 돼. 그러나 존은 부정보다 앞서나가는 희망을 멈추게 만들 수가 없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진작 베이커가로 와 볼걸 그랬다고 생각했지만, 그동안 수도 없이 찾아갔던 그 집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 텅 빈 자리만이 남아 있었기에 존은 조금도 의심할 수가 없었다. 마이크로프트가 여전히 그들이 살던 집을 대신 소유하고 있다는 얘기를 허드슨 부인에게서 들었을 때조차도, 그저 동생을 잃은 슬픔에 존 그 자신처럼 셜록과 관련된 장소나 기억을 소유하고 싶어 그러는 거라고만 생각했다. 흰 입김을 쏟아내며 존은 달렸다. 말도 안 돼. 어깨를 부딪힌 사람들의 욕설이 들려왔지만 존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멈추어 설 곳은 오로지 한 곳뿐이었다.

 눈앞에 허드슨 부인의 작은 가게가 보이자, 존은 숨을 고르기 위해 잠시 걸음을 늦추었다. 그들이 살던 2층의 거실 창가에 드리워진 커튼은 전에 없이 전등 빛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존은 놀라거나 기대하려 하지 않았다. 어쩌면 허드슨 부인이 다른 사람에게 세를 주었는지도 모르고, 아니면 마이크로프트가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찾아왔는지도 모르니까. 셜록이 택시를 잡곤 하던 도로를 가로질러 문 앞에 이르자, 존은 노크도 차임벨도 울리지 않고 손잡이를 돌렸다. 쉽게 열리는 문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건물 안으로 안내했다. 등 뒤로 문이 닫히자 세상은 어두운 침묵 속에 감싸였다.

“셜록?”

 자신의 목소리가 바보처럼 들리지 않길 바랐지만, 존의 목은 그의 의지를 거부했다. 제가 들어도 민망할 정도로 남자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존은 다시 계단 위를 올려다보며 외쳤다. 이번에는 좀 더, 강하게.

“셜록?”

 기다리지 못한 존은 한 걸음 계단을 내딛었다. 한 번 내딛고 나니 그 다음은 몸이 저절로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열일곱 개의 계단을 오르고 나니, 그 끝에 반쯤 열린 거실 문이 존을 맞이했다.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전등 불빛에 존은 눈을 찌푸리며 손을 들어 얼굴 위로 그림자를 만들었다. 문을 활짝 열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건조한 방 안의 풍경과 사뭇 다른 분위기를 뿜어내는 초록색의 플라스틱 트리였다. 그것은 은색과 금색의 작은 구슬들을 드리우고는 그들이 주로 앉던 거실 긴 소파 옆 빈 공간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한 남자가, 바닥에 엎드려 꿈틀거리고 있었다.

“셜록..?”

 존의 목소리가 의아함을 품고 가늘어졌다. 그러나 그 의아함은 남자가 몸을 일으키자 곧 해결되었다. 조용히 서 있던 트리가 반짝이기 시작했고, 존은 비로소 그 남자가 트리에 장식한 전구를 콘센트에 연결하기 위해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이 예수도 아닌데 일 년 하고도 여덟 달 동안 죽었다 이제 막 부활한 검은 머리카락의 남자는 몸을 돌려, 존이 그동안 너무나도 그리워한 미소를 띠운 채 자신의 키 만한 트리를 가리키며 존에게 말했다.

“늦었어, 존. 이번에도 트리를 장식할 기회를 놓쳤으니 아깝게 됐군.”


 그러나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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