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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 2010. 10. 9. 03:30

셜록/크로스오버 :: A Daydream


上.


 이른 아침, 셜록이 파란 파자마를 걸치고 침실을 막 빠져 나왔을 때, 그는 햇살이 어슴프레 비쳐 들어오는 부엌과 거실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는 두 남자를 보았다. 그리고 그 두 남자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셜록을 바라보며 합창하듯 인사했다. “Morning, Sherlock” 그리고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어떻게 그가 셜록인 걸 알았죠?”

“이 집에서 사는 건 너와 셜록 둘 뿐이니까 저 남자는 당연히 셜록이겠지.”

“제가 너무 당연한 걸 물었군요.”


  쓴웃음을 지으며 존은 커피 두 잔을 손에 들고 한 잔을 거실 소파에 앉아있는 남자의 앞에 내려놓았다. 고맙다고 말하는 그 남자는 천천히 머그잔을 들고- 이 컵은 모양이 좀 이상하군, 이라고 중얼거리며 -커피의 맛을 음미했다. 미간을 찌푸리며 그 모습을 바라보던 셜록은 존 보다 조금 나이 들어 보이는 그 남자가 굉장히 고풍스런 의상들을 입고 있음을 관찰로 깨달았다. 무릎 옆에 놓아 둔, 금박으로 화려한 문양이 수놓아진 회색 지팡이 하며-셜록은 보자마자 그 안에 긴 칼이 숨겨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1900년대 초반 혹은 1800년대 후반의 디자인처럼 보이는 양복과 조끼와 넥타이, 조금 낡은 듯하지만 잘 손질되어 있는 구두, 그리고 남자의 짙은 갈색 머리카락과 정돈된 콧수염은 마치 그가 옛날 고서적에 묘사된 런던의 어느 귀족처럼 보이게 했다. 셜록은 이런 행색의 남자가 왜 이 아침부터 자신의 집에 있는지 궁금했다.


“실례지만, 존. 이 분은 누구신가?”

“아… 그건-”

“셜록 홈즈. 만나서 반갑군. 내 이름은 존 왓슨. 직업은 의사라네.”


 잠이 덜 깨서 멍한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던 셜록은 한참 뒤에 대답했다.


“Pardon?”

“셜록, 그러니까- 이 분은-”


 존이 난처한 얼굴로 셜록을 올려다보는데 자신을 존 왓슨이라고 소개한 콧수염의 신사는 들고 있던 머그잔을 내려놓고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존. 둘이 친척 관계라거나 뭐 그런-”

“아니네. 나는 존 왓슨이야. 그리고 들어보니 이쪽도 자신을 존 왓슨이라고 하던걸. 그러면 너는 셜록 홈즈가 맞겠지.”

“셜록 홈즈 맞습니다만. 대체 왜 이 집에 존 왓슨이 둘이나 있는 거지?”


 마지막 말은 존을 향한 질문이었다. 이 기괴한 상황에 존은 자신이 이 모든 상황을 설명해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냥 꿈이라고 해 두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그건 꿈같은 현실이었다. 그렇다면 뭐라고 설명을 해야 셜록이 이해할까. 존은 멍하니 서 있는 셜록에게 일단 거기 카우치에나 좀 앉으라고 손짓했다.


“셜록, 내 말이 좀 우습게 들리겠지만- 그냥 들어줘. 아침에 일어나 보니 이 분이-”

“존 왓슨. 내 이름이라니까-”


  콧수염의 왓슨이 존의 말에 불쑥 끼어들자 존은 짜증 섞인 말투로 댁은 좀 가만히 있으라고 다그쳤다.


“이분이 거실에 있었어. 깜짝 놀라서 난 어디서 왔냐고 물었는데 자기도 왜 여기에 와 있는지 모르겠다고, 괜찮다면 집으로 가는 길을 좀 알려달라는 거야. 그래서 주소를 물었더니-”

“베이커가 221B라고 했지. 그랬더니 그게 여기라더군. 그럼 여긴 내 집인가? 하지만 그렇지 않아. 내가 살던 하숙집은 좀 더 넓고 멋진 곳이었는데. 우린 서로 이름을 묻다가 이름이 같다는 것에 놀랐고 여기에 셜록 홈즈가 산다는 사실에 나는 더욱 놀랐네. 나 또한 셜록 홈즈와 같이 살고 있으니 말일세. 두뇌 회전이 빠르고 명석하고 추리에 소질이 있는 명탐정 셜록 홈즈 말이야.”

“그리고 지독히도 청소를 안 하는- 게으른 셜록 홈즈이기도 하죠.”

“맞았어. 생긴 건 좀 다르지만 아무래도 자네가 아는 셜록 홈즈나 내가 아는 셜록 홈즈는 공통점이 많은 것 같군. 같지만 다른 사람이라고 해 두지.”


  죽이 척척 맞는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 틈에서 셜록은 대화 내용을 전부 이해했지만 대체 이게 말이 되는 말인가 싶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파자마 깃을 여미며 자신의 침실로 향했다.


“셜록! 말하다 말고 어디 가는 거야!”

“다시 자야겠네. 아무래도 내가 수면 부족인 것 같군. 존 왓슨이 둘이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존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셜록의 파자마깃을 붙들고 질질 끌어다 다시 카우치에 앉혀 놓았다. 제발 셜록, 이건 꿈도 아니고 거짓말도 아니야. 머리를 감싸 쥔 셜록은 존의 부름에도 대답하지 않고 한참을 그러고 앉아있었다. 자신도 혼란스러웠기에 셜록을 위로할 마음이 들지 않았던 존은 다시 닥터 왓슨- 그렇게 부르기로 마음먹었다 -의 맞은편 소파에 가 앉았다.


“굉장히 태연하시군요.”

“나 말인가? 흠. 그렇다고 해 두지. 친구라고 하나 있는 셜록이란 녀석 때문에 산전수전을 다 겪고 나니 이젠 조금 미스테리한 상황이 발생해도 그냥 그러려니 하게 되는군. 아무래도 내 정신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

“왠지 깊이 공감하는 바입니다.”

“둘 다 시끄러워요. 존, 그리고 닥터- 왓슨. 젠장. 존이나 왓슨이나!”

“고상하지 못하게 내 이름 앞에 젠장이란 수식어를 붙이다니. 자네 친구도 누구처럼 예의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모양이군. 내가 아는 그 셜록 홈즈랑 얼마나 어디까지 비슷한지 점점 궁금해지는 걸.”

“제가 대신 사과드리죠.”

“둘 다 제발 좀 닥쳐봐!”


  소리 지르는 셜록을 쯧쯧 하는 표정으로 존과 왓슨이 바라보았다. 그건 그거대로- 셜록에겐 참 기분 나쁜 경험이었다.


“닥터 왓슨. 존, 너 말고. 난 아무래도 못 믿겠으니 제가 하는 질문에 맞는 답을 해 보시죠.”

“재밌군. 질문에 맞게 답한다면, 내가 정말 존 왓슨이 되는 건가? 난 이미 존 왓슨인데?”

“그냥 좀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하세요.”


 셜록은 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존 왓슨이 좋아하는 여인의 이름이 뭐죠?”

“메리.”

“틀렸어요.” 셜록이 재빨리 대답하자 왓슨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존을 바라보았다.

“메리가 아니란 말인가, 존? 그럼 누구지?”


  한숨을 내쉬며 존이 말했다.


“사라에요. 메리가 아니라. 이전에 사귀었던 사람 중에 그런 이름이 있었던 것도 같군요.”

“자네 바람둥이로군.” 피식 웃는 왓슨을 보며 셜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이게 뭔 소리래? 하는 표정으로 존은 셜록을 보았지만 셜록은 그를 외면하며 다시 왓슨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럼 두 번째 질문. 제 형의 이름은 뭐죠?”

“마이크로프트 홈즈.”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왓슨의 대답에 존도 셜록도 놀라고 말았다. 그리고 그들의 놀란 표정을 보며 왓슨도 놀랐다.


“맞았어? 자네 형 이름이 정말 마이크로프트란 말인가? 이거 정말 꿈을 꾸는 것 같군.”

“혹시 셜록 스토커라던가- 뒷조사를 한 건-”


  존이 알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박이며 왓슨에게 말하자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스토커? 그게 뭔가? 그리고 뒷조사라니. 난 그냥 아는 대로 답했을 뿐이네.”

“그렇다면… 제가 세 번째 질문을 해도 될까요.”


  존의 난데없는 발언에 셜록은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을 승낙의 표시로 이해한 존은 지체 없이 왓슨에게 물었다.

“셜록의 친구는 몇 명이죠?”


  왓슨은 이 이상한 질문에 빙그레 웃고 말았다. 그리고 대답했다. “두 명. 그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일세.”

“두 명이라면, 누굴 말하는 거죠?”

“존 왓슨. 그가 셜록과 친구가 되어서 기쁘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아닌지는 별개로 해 두지. 그리고- 저기 저 해골.”


  가지고 있는 지팡이로 벽난로 위를 가리킨 왓슨을 보고 존은 박수를 쳤다. “굉장해!”

“존. 그건 별로 좋은 질문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객관성이 떨어져.”

“왜? 내가 생각하는 걸 정확히 맞췄는데. 이건 정말- 굉장한 일이야.”


  존을 째려보던 셜록은 왓슨이 자리에서 일어나 벽난로 위의 해골에 손을 뻗어 쓰다듬자 이젠 그 쪽을 노려보았다. 그의 시선을 무시하며 왓슨은 해골을 품에 안았다. 처음 보았을 땐 해골 따위 정말 싫었는데 이 낮선 곳에선 그것마저 반가워지다니, 이상한 일이야. 왓슨의 중얼거림을 들으니 존은 마치 그것이 자신의 일인양 기분이 이상해졌다.


“사실 나는 베이커가의 이 집에 존 왓슨과 셜록 홈즈가 산다는 말을 들었을 때 이 해골을 보고 정말로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집에 사람 해골이 있는 게 어디 흔한 일인가.”


  미소 짓는 왓슨을 보며 존 또한 미소로 답했다. 왠지 두 사람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묘한 이해관계가 구축되어 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이 어째 마음에 들지 않은 셜록은 또다시 그를 시험하고자 하는 마음이 샘솟았다. 사실 그건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도플 갱어도 아니고, 얼굴도 다른데 이름이 같고 주위 환경이 비슷하다니. 셜록은 그가 자신들의 관계를 뒷조사하고 그걸 이용해 뭔가 뒷수작을 부리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불안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의심의 끈을 절대 놓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저 존이라는 작자는 의심은커녕 즐거워하고 있다니! 정말 태평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어 보였다.


“닥터 왓슨. 그럼 당신이 알고 있는 나와 존에 대해서 전부 다 말해 보시죠.”

“자네의 태도가 썩 내키지는 않지만 나 또한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마찬가지니 셜록, 자네에게 일을 의뢰하는 셈 치고 말하도록 하지. 난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의가사 제대했고 군의관이었네. 런던에 돌아와서 우연히 소개로 셜록을 만나게 됐고 그와 함께 살았지. 셜록 홈즈는 탐정 일을 하고 있었고 우린 레스트레이드 경감을 도와주며…”

“레스트레이드라고?”


 놀란 존이 소리치자 셜록은 냉정하게 말했다. “레스트레이드의 이름을 알아내는 것쯤은 쉬워, 존. 너무 놀라지 말게.”

“제발 내가 말하는데 끼어들지 말아 주겠나. 보아하니 레스트레이드라는 자의 이름도 같은 모양이군. 정말 놀라운 걸. 아무튼 여러 가지 사건을 해결하며 지냈네. 나는 그의 업적을 논문으로 발표했고 홈즈는 점점 유명해졌지. 나는 곧 메리라는 여성과 결혼해서 집을 나갈 예정이고, 셜록은 아이린이라는 여성을 좋아하지만 그와 결혼할 생각은 없는 것 같더군. 정확히 말하면 아이린이 셜록과 결혼할 생각이 없는 거겠지만.


  왓슨의 말이 잠시 멈추자 존은 미간을 찌푸리며 셜록을 보았다.


“자네 아이린이라는 여성을 좋아했나?”

“모르는 여자야!” 셜록은 펄쩍 뛰었다. 그러자 닥터 왓슨이 끼어들었다.

“그래? 그것 참 이상하군. 아무래도 우린 여자관계에 있어서는 좀 다른 모양이네.”


  셜록은 손을 휘휘 내저으며 짜증나 죽겠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모르는 여자니까 존,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 건 그만둬줘.”

“…의심스러운데.”


  그런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왓슨은 재미있다는 듯이 큭큭거렸다.


“마치 자네 둘- 남편의 불륜을 의심하는 아내의 대화 같-”

“아니거든요!”


  존과 셜록이 동시에 소파에서 튀어오르듯 반응하자 왓슨은 웃음을 뚝 그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과민 반응하는군, 자네들. 여튼 그건 됐고, 내가 아는 셜록은 지루해지면 실탄을 가져와서 벽에 총 쏘기를 하고”

“그건 이 셜록과 똑같군요.” 존이 말했다.

“툭하면 약물 실험이나 화학 실험을 하고”

“그것도 같아요. 덕분에 거실에 화학약품 냄새가 잔뜩 배었죠.”

“생각할거리가 있으면 몇 시간이고 바이올린을 켜고-”

“듣기 좋을 때도 있지만 어쩔 땐 정말 시끄럽죠.”

“거실이랑 방에 널려있는 서류나 책 정리는 일 년에 한두 번 할까 말까지.”

“정말 더러워 죽겠어요!”

“둘 다 그만!!”


  셜록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더니 쿵쾅거리며 자신의 침실로 달려 들어가 문을 쾅, 하고 닫았다. 바람과 같이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던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며 말했다. “삐졌군요.” “삐졌어.” 그리고는 한참을 큭큭대며 웃어댔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지긴 했지만, 마치 영혼의 쌍둥이라도 생긴 양 이상하게도 기분이 좋아진 존은 머그컵을 들고 부엌으로 향했다. 비록 시대와 동떨어진 듯 보이는 외관과 말투가 자신과는 매우 달랐지만. 존은 생각난 김에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고 있는 왓슨을 보며 물었다.


“혹시… 올해가 몇 년인지?”

“1888년 아닌가?”


  존은 벙찐 표정으로 왓슨을 바라보았다. 전형적인 영국 신사의 행색을 한 이 의사를.


“2010년입니다.”

“거짓말 하지 말게.”


  콧수염을 긁적거리는 왓슨에게 반박할 기운도 남아있지 않은 존은 한숨을 내쉬면서 말을 돌렸다. 아무렴 어때.


“아- 괜찮으시다면 아침은 제가 사 올까요? 삐진 저 친구는 그냥 내버려두면 알아서 기어 나올 테니 우리끼리 먼저 먹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그러지. 그런데 허드슨 부인이 식사를 마련해 주는 게 아니고?”

“그녀는 집 주인이지 가정부가 아니니까… 라니, 허드슨 부인도 같은 겁니까? 1888년인데?!”

“뭘 그리 놀라나. 난 점점 재밌어지는 걸.”


  즐거워하는 기색이 역력한 왓슨을 보며, 존은 어쩌면 이 사람은 자신보다 더 특이한 성격의 소유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면 너무 셜록에게 시달린 나머지 정말로 정신에 문제가 왔다거나. 그렇다면 대체 이 왓슨이 아는 셜록은 어떤 성격의 소유자란 말인가? 상상하기도 무서워진 존은 재빨리 자켓을 걸쳐 입으며 왓슨에게 잠시만 기다리고 있으라고 말했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왓슨을 보며 존은 그를 데리고 나가려던 자신의 생각을 접길 잘 했다고 생각했다. 1888년이라고 착각하는 그가 2010년의 세상을 마주한다면 어떤 혼란에 빠질지 모를 일이니까.

  갑자기 또 두려워진 존은 계단을 내려가다 말고 다시 올라와 왓슨을 향해 외쳤다.


“절대 밖에 나가면 안 돼요. 절대! 여기서 그냥 기다려요-!”








下.


“여자들이란, 달콤한 미소를 지으면서 몰래 품에 숨겨두었던 독약을 술에 타는 거나 하는 건 예사거든. 정말 진절머리 난다니까.”

“아이린이란 분이 그런 여성이었나 보군요.”

“헉. 네가 그걸 어떻게…!!!”

“이미 왔다 가신 분이 친절하게 다 설명해 주었으니까요.”


  존은 바짝 마른 나무가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들어가는 벽난로 앞 소파에 앉아 머리를 감싸 쥐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람. 그런 그의 고뇌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셜록은 냉장고에서 꺼낸 와인을 잔에 따라 소파에 앉은 남자에게 내밀었다. 검은 머리카락에 꽤 나이 들어 보이고 게다가 수염까지 덥수룩하게 기른 남자는 그 와인 잔을 받아들고 고맙네, 하며 한 모금 들이켰다. 존은 생각했다. 아무래도 자신이 사라와의 저녁식사 때 술을 너무 많이 마신 것 같다고. 그래서 이런 환영이 보이는 것일 거라고.


“존? 자네 괜찮나?”

“아니. 전혀. 대체 이 사람이…”

셜록 홈즈. 말하지 않았나. 정말 재밌군 그래. 셜록 홈즈가 나 말고 또 있다니 말일세.”

“…하나도 재미없는데요.”


  동명이인의 존 왓슨이 찾아왔던 것이 바로 삼일 전 일이었다. 하루 종일 의기투합해서 셜록에 대한 불만 토로를 좀 하고 났더니 속이 시원했는데, 언제 왔느냐는 듯 그는 다음날 아침에 사라져 있었다. 그가 왔다 간 흔적은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아서, 애초에 만나지 않았던 것처럼 되어버렸다. 설명할 수 없는 그날의 일에 대해선 셜록도 별다른 말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그렇게 잊혀지고 있었다.

  그런데 또.

  이번엔,

  셜록이라니.

  존은 창문을 열고 그 아래로 거꾸로 매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셜록이 둘이라고? 이거 마이크로프트에게 연락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얗게 질려가는 존을 보며 자신을 홈즈라고 불러 달라던 남자가 물었다.


“자네 안색이 안 좋은데 병원에 가보지 않아도 괜찮겠나?”

“홈즈, 그는 의사에요.”

“아 그렇지. 난 가끔 왓슨이 의사라는 사실을 잊는다니까. 그러고보니 그는 사람 살리는 재주는 좋았어. 내가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와서 구해줬거든.”

“꽤 번거로운 일이었겠군요.”


  셜록의 그 말이 뭐가 그리도 우스운지 홈즈는 크게 폭소했다. 그리고는 와인을 벌컥벌컥 들이마시고는 테이블위에 점잖지 못하게 내려놓았다. 문득 어제 저녁 자신이 사온 와인의 안부가 걱정된 존은 셜록에게 물었다.


“셜록, 대체 얼마나 마신거야?”

“글쎄. 자네가 사온 와인은 거의 사라졌다고 해야겠군. 그래도 걱정 말게, 존. 내가 사다놓은 와인이 한 병 남아있고, 우리가 마신 양은 아마도 자네가 저녁식사 때 마신 와인보단 양이 적을 테니.”


  셜록의 말에 존은 경악했다.


“뭐? 내가 와인을 마신 건 어떻게 알았나?”

“자네 와이셔츠 소매 끝에 아침엔 없었던 보랏빛 얼룩이 남아있군. 와인 얼룩은 빼기 힘들 텐데 고생 좀 하겠어. 그리고, 술을 잘 안 마시는 자네한테서 지금 얼마나 술 냄새가 나는지 자네는 모르겠지. 데이트는 즐거웠나 보군.”


  입을 딱 벌린 존을 외면한 채 셜록은 빈 잔을 들고 다시 부엌으로 향했다. 술기운이 올라 조금 얼굴이 붉어진 홈즈는 존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데이트라고? 그럼 메리인가?”

“아니오, 홈즈. 메리가 아니라 사라에요. 사라 소여.” 셜록이 부엌에서 외쳤다.

“오, 왓슨. 자네 바람둥이인가?”

“그만 좀 닥쳐요, 셜록 홈즈 씨.”


  마지막 존의 말에 부엌에서 셜록의 큭큭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웃어? 존은 전혀 그럴 기분이 아니었지만 셜록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또다시 술잔을 들고 나온 걸 보면.


“존은 메리를 만나고 나서부턴 변했어. 난 그와 함께 사건을 해결하는 게 즐거웠는데 말이야. 언제부턴가 내가 함께 가자면 진저리를 치더군. 이 존 왓슨도 그러는가?”

“오, 아직까지는 상냥한 존 왓슨입니다만. 글쎄요. 존. 자네 나랑 사건을 해결하는 게 재미없나?”


  셜록은 소파에 앉아있는 홈즈에게 잔을 건네고 나머지 잔을 존에게 내밀자 존은 그것을 받아들고 셜록을 흘겨보았다. 존은 셜록이 전혀 취한 기색이 없는 것을 보고 그가 별로 마시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화를 내듯 잔에 가득 든 와인을 벌컥벌컥 들이킨 존은 휘청이며 테이블 위에 빈 잔을 올려놓고 “아니, 전혀. 재미있어 미칠 지경이네.” 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아니라는군요.” 셜록이 미소지었다. 존은 자신의 말에 들어있는 의미를 좀 잘 생각해보라고 그의 목을 붙들고 짤짤 흔들고 싶었지만 진이 빠져버려 그냥 그만두었다. 그리고 그 말의 의미를 역시 제대로 이해 못한 다른 바보 하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다행이로군. 존, 내가 조언하나 해도 되겠나. 여자란 시도 때도 없이 변하는 생물이거든. 그러니 만약 그…”

“사라.” 셜록이 끼어들었다. 붉은 얼굴의 홈즈는 고개를 끄덕이며 신이 난 듯 말했다.

“그래. 사라라는 여자와 결혼 할 생각이라면 관두게. 사내란 자고로 대의를 위해서 위험에 뛰어들 줄도 알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모든 걸 버릴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일세.”

“…그래서 아이린이란 여성분이 (댁과) 결혼 할 생각이 없으신 모양이군요.”

“……”


  일단 홈즈의 입을 틀어막는데 성공한 존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 이 셜록 홈즈는, 지금 자신과 살고 있는 셜록보다는 좀 상대하기가 쉬운 편인 것 같다. 그리고 의학적으로 분석해보건대 조울증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감정의 기복도 심한 편인 듯 하고.

  그러나 지금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건 존 자신이었다. 마지막에 마신 와인의 취기가 도는지 술기운에 졸음이 쏟아지려 하자 존은 셜록이 자주 누워있던 그 카우치로 휘청휘청 다가가 벌러덩 드러누웠다. 금방이라도 빨려들어갈 것처럼 세상이 뱅글뱅글 돌았다. 셜록이 둘이건 셋이건 간에 지금 존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멀리서 셜록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점점 멀어져갔다. 존, 여기서 잘 생각이라면 잘못된 판단이라고 말하고 싶은데. 존, 일어나보게. 존?


“잠들었군.”

“그렇군요.”


  존이 비운 와인 잔을 들고 셜록은 그것을 혀끝에 가져다 댔다. 달콤한 기운이 혀끝에 느껴진다. 잔에 남아있는 와인 향을 잠시 음미하다가 셜록은 부엌에서 따지 않은 새 병을 들고 나와 코르크 마개를 열었다. 시큼한 와인의 향기가 금세 방안을 채웠다. 홈즈의 앞에 놓인 잔에 와인을 가득 따르고, 뒤이어 자신의 잔을 가득 따른 셜록은 병을 홈즈의 잔 옆에 내려놓았다. 침묵을 지키고 있던 홈즈는 카우치에 누워 잠든 존을 바라보다가 조금 목이 메어 말했다.


“셜록, 자네는 좋은 친구를 두었군.”


  그 말을 들은 셜록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갔다.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일 텐데요. 셜록 홈즈 씨.”

“그래, 그렇지.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그를 너무 괴롭힌 게 아닌가 하는 후회가 드네. 자네와 내가 어디까지 비슷한지 잘 모르겠지만, 그- 나는 사교성이라는 것이 전혀 없거든.”

“세간의 제 평가 또한 다를 바 없을 것 같군요. 하지만 전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래. 나도 그랬지. 하지만 말이야, 존이 메리랑 결혼하고 이 베이커가의 하숙집을 나간다고 했을 때, 난 왠지 모르게 화가 났네. 그래서 그를 좀 괴롭혔지. 내가 심했는지도 몰라.”


  홈즈의 말을 들은 셜록은, 평소에는 전혀 하지 않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기 스킬을 마음속에서 시전했다. 어느 날 존이 밝은 얼굴로 자신을 보며 사라와 결혼할 것이라고 공표하고는 베이커가의 하숙집을 훌쩍 떠난다면 자신은 어떤 기분일지 상상해 보는 것 말이다. (물론 그는, 사건을 맡았을 때 범인의 생각을 알아보기 위해서 범인의 입장이 되어 추리력을 동원해 상상하는 때 빼고는, 평소에 전혀 이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한참동안 생각하던 셜록은 조금 떨떠름한 표정으로 홈즈에게 말했다.


“…그 기분, 조금 알 것 같군요.”

“정확히 말하자면 재밌는 동화책을 빼앗긴 어린아이 같은 기분이었네. 혹은 맛있는 사탕을 빼앗긴.”

“그것도 아주 달콤한.” 셜록은 카우치에 누워있는 존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심통이 났지.” 홈즈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와인 잔을 비우더니 떨리는 손으로 다시 빈 잔을 채웠다.


“어쩌다 내가 이곳에 와서 자네들과 마주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왓슨과 떨어져 있으니 난 그저 불안하기만 하군. 난 이대로 영영 존을 잃게 되는 걸까? 그럼 무척, 슬플 거야.”

“음, 그건 아닐 겁니다. 이전에 왔었던 존 왓슨도 금방 떠난 걸요. 당신이 있던 곳으로 갔을 거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만. 당신이나 그 존 왓슨이 어디서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관찰만으론 추리가 성립되지 않지만, 뭐,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셜록이 하는 ‘그러니 당신들에겐 크게 신경쓰지 않겠다’ 란 말과도 같았다. 셜록은 아직도 그들이 1888년에서 2010년의 현재로 왔다고 믿고 있진 않았지만, 마치 털 빠진 강아지처럼 보이지 않는 귀와 꼬리를 축 내리고 있는 셜록 홈즈를 보니 어쩐지 대신 위로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며칠 전 찾아왔던 존 왓슨에게 엄청 시달렸을- 잔소리 하는 부인처럼 -셜록 홈즈를. 그 위로는 성공했는지 홈즈는 한껏 안심한 표정으로 셜록을 바라보았다.


“고맙네. 자네는 나보단 괜찮은 사람인 것 같군. 더불어 여자란 얼마든지 술에 독을 탈 수도 있는 존재라는 걸 저 존 왓슨이 하루 빨리 알아차리길 바라겠네.”


  그 말을 들은 셜록은 빙긋이 웃었다. 자신 앞에 놓아둔 와인 잔을 단숨에 비운 셜록은 카우치로 다가가 늘어져 있는 존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술에 약을 타는 건 굳이 여자가 아니어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아마 존은 평생 가도 못 알아챌지도 모르겠군요. 그는 의사면서도 수면제에 꽤 둔감하거든요.”


  영차, 셜록은 양 어깨에 축 늘어진 존의 팔을 들쳐 멨다.


“셜록 홈즈 씨, 전 이만 침실로 갈 테니 괜찮으시다면 카우치에서 주무시죠. 벽난로는 놔두면 저절로 꺼질 테니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담요는 카우치 옆에 있으니 덮으시구요. 그럼, 먼저 실례.”


  그리고는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자신의 침실로 향했다. 셜록의 말에 할 말을 잃은 홈즈는 마악 들이키려던 와인 잔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셜록의 침실문 건너편에서 셜록이 존을 침대 위에 내던지듯 내려놓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생각났다는 듯이 셜록이 문을 닫으려다 말고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아, 걱정 마세요. 그 와인 잔에는 수면제를 넣지 않았으니까. 다 드셔도 될 겁니다.”


  그리고 침실 문은 조용히 닫혔다. 혼자 남은 홈즈는, 진심으로, 아이린 애들러보다 저 셜록 홈즈가 더 무섭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존 왓슨에 대한 애도의 마음을 가진 것도 잠시, 와인 한 병을 다 비우고는 휘청거리며 카우치에 쓰러지듯 드러누워 정신을 잃었다. 꿈 속에서 손짓하는 왓슨을 향해 미소지으며.






 상하로 나뉘어 있던 글인데 상편도 그렇지만 하편에서 쫄딱 망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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