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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 2012. 1. 10. 01:00

마레 :: He knows everything



  이탈리아에서 보낸 일주일간의 휴가는, 조금 진부한 표현이지만 그야말로 달콤한 휴식 그 자체였다. 검게 탄 얼굴로 밀라노 공항에 들어서는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레스트레이드는 아쉬운 듯 이탈리아의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작년 말 즈음 아내와 함께 이 이탈리아 여행을 미적지근하게 계획했을 때만 해도, 레스트레이드는 자신이 홀로 이곳에 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일이란 언제든지 일어나는 법. 아니, 사실 조금 불안하긴 했다. 레스트레이드는 결혼한 지 5년 만에 권태기에 빠져버린 아내와의 관계를 회복하는데 이 여행이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실행하기도 전에 아내의 외도로 인해 그들의 관계는 끝이 나고 말았다.

 실연의 아픔도 잠시, 야드 일로 바빠 다른 것에는 신경 쓸 여유가 없었던 레스트레이드는 휴가를 맞이하기 일주일 전이 되어서야 비로소 여행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혼자 이탈리아로 떠나야 하나? 그가 여행을 가든 가지 않던, 예약해 둔 비행기를 취소하는 시기도 놓쳐 이미 날아간 돈은 어떻게든 돌아오지 않을 판이었다. 어쩔 수 없이 레스트레이드는 비행기의 빈 옆자리와 함께 여행을 떠날 것을 택했다. 그러나 그 빈자리를 볼 때마다 바쁘다는 핑계로 진작 아내를 챙기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질책과, 외도로 떠나간 아내에 대한 원망으로 기분이 착잡해져 가는 것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모든게 물색해질 정도로 홀로 떠난 여행은 의외로 즐거웠다. 완연한 봄에 접어든 남부 이탈리아는 뜨거운 태양빛과 일렁이는 푸른 바다로 가득했고, 레스트레이드는 반팔 셔츠와 반바지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것에 곧 익숙해졌다. 밀라노와 로마, 베니스 등의 관광지를 돌아보는 동안 그는 이국적인 풍경에 마음마저 누그러져, 혼자이면 뭐 어떠랴, 하며 현지에서 만난 프랑스 여성과 함께 펍에서 맥주를 나눌 만큼 여유를 되찾아갔다. (그녀가 영어가 서툴렀던 탓에 관계는 별 진전이 없었지만)

 혹시나 해서 로밍해간 핸드폰도 그의 휴가를 도우려는지 내내 고요했다. 처음 며칠간은 일부러 꺼두기도 했지만, 어쩐지 불안해져서 남은 기간 동안 내내 켜두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휴식을 방해하는 이는 없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의아하게 여기면서도 레스트레이드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언제부터 야드에서 휴가 나간 사람을 존중하는 문화가 생겨난 거지. 자조하는 농담을 생각하던 그는 동시에 남의 휴식을 방해하는데 (동생만큼이나) 탁월한 재능을 가진 한 남자를 떠올렸지만, 이내 마음속에서 지웠다.

 그렇게 꿈만 같던 일주일이 지나고 이제 남은 건 정들었던 도시를 떠나는 일뿐이었다. 새로운 곳에서 홀로 지내는 동안 어느 정도 마음의 정리도 되었기에, 예정된 빈자리를 보아도 그리 씁쓸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공항에 조금 일찍 도착한 탓에 티켓을 발권하려면 아직 한 시간 정도 여유가 더 있었다. 레스트레이드는 민소매에 드러난 붉게 탄 팔을 긁적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공항은 한산했다. 이맘때 여행을 나오는 사람이 드물지는 않았지만 출국하기엔 조금 이른 시간이긴 했다. 하릴없어 캐리어를 끌고 대기실로 향한 레스트레이드는, 작은 테이블에 짐을 내려놓자마자 음료를 사오기 위해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어디선가 작은 진동 소리가 들렸다. 레스트레이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핸드폰의 존재를 잊고 있었던 터라 어디다 두었는지도 몰라 한참동안 자신의 짐과 씨름하던 그는, 캐리어 앞주머니 깊숙히 넣어둔 핸드폰을 겨우 꺼내들었다. 진동은 멈추었다 울렸다를 반복해서, 벌써 부재중 전화 세 통을 기록하고 있었다. 액정에 뜬 이름을 확인한 레스트레이드는 이 전화를 받아야 하나 잠시간 고민했다. M.H. 이제 여행도 끝나고 돌아갈 때가 되니 어김없이 나타나는 이름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통화가 길어질 것을 예감하고 대기실의 푹신한 소파에 앉은 레스트레이드는, 다소 딱딱한 어투로 전화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핸드폰 너머 나긋한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목을 움츠렸다. 꼭 소름같은 게 돋을 것만 같았다. 소름이라기보다... 전율 뭐 그런 것에 더 가까웠지만.

 아니, 어쩌면, 공포?

 

- 바쁘십니까?

“당신 전화를 받으니 퍽 바쁘다고 말하고 싶군요, 홈즈씨. 하지만 아닙니다.”

- 아, 다행이군요. 하도 전화를 안 받기에 바쁜데 방해를 한 건가 걱정했거든요.

“뭐, 바빴다고도 할 수 있죠. 휴가 중이니까요.”

- 휴가라고요? 정말입니까?

 

 톤이 하나 쯤 높아지는 마이크로프트의 목소리를 들으며 레스트레이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애써 모르는 척 하지 않아도 됩니다.”

-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정말 몰랐는데요.

 

 정색하는 말투에 레스트레이드는 진심으로 놀랐다. 영국에서 마이크로프트가 알지 못하는 일이라곤, 기껏해야 ‘여왕의 침실에서 은밀히 일어나는 일’ 정도 아니었나? 내가 일주일이나 야드를 비웠다는 걸 몰랐다고? 의심이 들었지만 레스트레이드는 넘어가기로 했다. 마이크로프트와 맞네 아니네 하는 기싸움을 벌여봐야 득 되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하지만 조금 실망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 생각을 한 레스트레이드는 문득 경악했다.


 내가 지금 무엇에 실망했다는 거지? 헛기침을 하며 레스트레이드가 말했다.

 

“뭐, 상관없겠죠. 당신이 날 찾지 않는 동안만큼 런던은 평화로웠다는 얘길 테니까요.”

- 하하. 그렇군요. 하지만 그 평화를 깨는 자가 꼭 하나씩 있기 마련이지요. 부끄러운 일입니다만-.

 

 그 대목에서 레스트레이드는 살짝 미소 지었다. 그는 영국 정보부의 수뇌이기도 하지만, 언제나 동생을 걱정하느라 바쁜, 비범한 형이기도 하다.

 

“당신을 부끄럽게 만드는 일이라면, 셜록 때문입니까?”

- 그렇습니다.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요.

 

 댕-댕- 뒤늦은 경보음이 울렸다. I need your help. 단순하면서도 낯부끄러운 문장을 거침없이, 그것도 조금 간절하게 말하는 법을 아는 남자는 위험하다. 그러나 레스트레이드는 자신이 고작 그의 몇 마디 요청에 마음이 약해지는 것이 더 싫었다.

 사실 레스트레이드는 누군가의 부탁에 쉽게 마음이 약해지는 타입이었다. 다시 말하면, 동정심이 많았다. 마이크로프트의 요청뿐 아니라 그 누구의 요청도 능력 되는 선 안에서는 다 들어줄 만큼. 그 동정심이 그가 경찰이 되는데 작용한 여러 이유 중 하나였지만. 우습게도 본인은 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따라 레스트레이드는, 자신이 그들 형제의 하수인처럼 부림당하는 것에 대한 반항심이 생겨났다. 그건 휴가의 마지막 날을 방해받아서이기도 했고, 자신의 휴가를 몰랐다는 데서 온 실망 탓이기도 했다. (물론 본인은 자각하지 못했지만) 생각해보면, 야드의 경감 자리에 오른 그가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아주 상관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정부 요직에 앉은 한 남자의 지시에, 휴가의 마지막 날까지 포기해가며 따를 이유가 어디 있나.

 하지만 그의 승진에 크게 한 몫을 한 셜록의 도움을 떠올릴 때마다, 레스트레이드는 아주 작은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도노반 경위는 그런 그의 속내도 모른 채, “경감님, 유달리 그 두 홈즈에게는 약하시네요?” 라며 자주 핀잔을 주곤 하지만 그건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두 형제에게 약한 것도 사실이고, 어떤 형태로든 그들에게 보답을 하고 싶은 것도 사실이니까.

 그래서 레스트레이드는 조금 밋밋하게 저항했다.

 

“휴가 중입니다만.”

 

 그건 누가 들어도 웃을법한 변명이었다. 그렇게 말하는 레스트레이드의 목소리가 영 시원찮았기에 더욱. 그러나 마이크로프트는 웃는 대신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 ...부탁합니다, 경감.

 

 레스트레이드는 얼굴을 감싸 쥐고 싶었지만 마침 대기실에 들어온 다른 여행객들을 지나치게 의식하느라 그러지 못했다. 대신 한숨을 쉬고 턱을 몇 번 긁적인 후 조그맣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레스트레이드는 상대의 얼굴을 굳이 보지 않아도, 그가 자신의 대답에 미소 지었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었다. 정말 그랬는지 어쨌는지, 마이크로프트는 한껏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 감사합니다. 그럼 당신이 오늘 이탈리아에서 돌아오는 시간에 맞추어 공항에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셜록이 있는 장소와, 가서 해야 할 일은 그들이 알려줄 겁니다. 안타깝게도 지금 그 애는 런던에 없거든요,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차를 타고 이동해야 할 겁니다. 귀찮게 해드리는군요. 더 궁금한 점 있습니까, 경감?

“없습니다. 런던에 도착하는 비행기가 오후 4시로 예정되어 있으니, 이야기는 공항에서 듣도록 하... 잠깐, 이탈리아라구요?”

 

 레스트레이드는 입을 떡 벌렸다. 핸드폰을 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경악에 가까운 그의 목소리에 주위에 앉아있던 여행객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알지 못한 채 레스트레이드는 자신이 뒤늦게 알아챈 사실에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수화기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태연자약했다.

 

- 이탈리아에 있는 거 아니었습니까?

“그, 그걸 어떻게....”

- 설마 내가 경감이 어디에 있는지 정말 모를 거라고 생각했습니까? 의외로 순진한 구석이 있군요. 오늘은 당신이 이탈리아에서 머무는 마지막 날이잖습니까. 어제는 피렌체, 그제는 베니스에 다녀왔지요. 틀립니까?

“홈즈씨!”

 

 그의 외침에 재차 여행객의 따가운 시선이 쏟아졌다. 졸지에 무례한 여행자가 된 레스트레이드는 비로소 제 실수를 깨닫고 캐리어와 짐들을 주섬주섬 챙겨 재빠른 걸음으로 대기실을 빠져나왔다. 비행기의 출발 시간이 다가오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사람들로 인해 북적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레스트레이드는 혼란의 바다 속에서 헤엄치며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걸었다. 핸드폰을 쥔 손이 붉게 굳어갔다.

 

- 아무튼, 잘 부탁드립니다, 경감.

“셜록을 도우러 가겠다고 안 했습니다.”

 

 레스트레이드는 이를 악물며 대꾸했다. 그럼 그렇지. 이 남자에게 속은 자신이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하수인처럼 부려먹는 것도 모자라서, 이젠 놀리기까지 하나! 반항심이 타올랐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 부탁은 들어주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마이크로프트는 그게 무슨 소리냐며 그의 발언을 확인 사살했다.

 

- 방금 전에, 공항에 도착하면 이야기를 듣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잘못 들은 거겠죠. 홈즈씨. 없던 이야기로 하겠습니다.”

 

 짜증난 나머지 어린애처럼 우기는 레스트레이드가 우스웠는지, 수화기 건너편에서는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뭐가 웃깁니까?” 물으니 웃음을 참는 말투가 이어져 레스트레이드를 더욱 분노케 했다.

 

- 일부러 놀리려고 그런 건 아닙니다. 경감.

“그게 아니면 뭡니까? 일종의 유머입니까? 아니면 심심풀이 땅콩? 하여튼 당신들 형제는...”

 

 투덜거리는 레스트레이드를 달래듯 마이크로프트의 변명이 이어졌다.

 

- 내가 경감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알고 있다는 걸 밝히는 것도, 경감을 무안하게 만드는 일일 텐데요.

“새삼스럽게 모르는 척하는 것도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만. 차라리 그냥 다 알고 있다고 말하시죠.”

- 그러면 우리의 대화의 폭이 좁아지지 않겠습니까.

“하, 그런 대화의 기술은 누가 알려 줬습니까? 알면서도 일부러 모른 척 하라니. 대화의 기술이라면 만만치않게 소질 없는 당신 동생이 알려줬을 리는 없을테고.”

- ...비서가 그러라고 하더군요. 이런. 너무 티 났습니까?

 

 전에 없이 살짝 불안해진 목소리에 레스트레이드는 저도 모르게 얼빠진 듯 웃어버렸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에서도 듣기 좋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통화에 집중하느라 정처 없이 헤매다, 비로소 탑승 개시를 알리는 전광판 앞에서야 자신이 가야할 곳을 찾은 레스트레이드는 손목 시계를 들여다 보며 티켓 수속을 밟기 위해 카운터로 향했다. 핸드폰은 여전히 귀에 댄 채로. 그 너머에는 여전히 마이크로프트가 있었다. 모든 걸 다 안다는 듯이.

 

- 그래서, 내 선물은 준비했습니까, 경감?

“...홈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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