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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 2010. 10. 6. 02:00

셜존 :: Dinner



노덤벌랜드가 22번지가 마주보이는 음식점에 들어서자, 익숙한 소음과 따뜻한 조명, 맛있는 음식 냄새가 전신을 포근히 감싸오는 듯한 느낌에 존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핑크색 연구’ 사건 이후로 그 식당에 처음으로 혼자 오는 것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자주 오는 단골 식당 마냥 그곳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키 크고 잘생긴 청년이 안내해주는 그때 그 창가 자리에 앉으며 존은 결국 중얼거리고 말았다. 오늘은 노덤벌랜드가를 관찰 할 필요도 없는데….

 


Dinner


 

 존은 청년이 가져다주는 메뉴판을 받아들고 잠시 고심하다가 구운 감자가 곁들여진 로스트 비프를 시켰다. 따뜻한 물을 홀짝이고 있으려니 지금쯤 셜록은 뭘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었다. 평화롭게 사느니 차라리 전장을 선택하고 말겠다는 극단적인 성격을 가진 그의 룸메이트는 사흘이 멀다하고 새로운 사건과 실험에 열중하다가 기어코 5일 전에 쪽지 하나만을 덜렁 남겨두고 떠난 뒤 아직까지 소식이 없었다. ‘범인을 추적하러 웨일스에 다녀올 예정. 일정 미정.’ 존이 의사 일로 바쁘지 않은 날에는 셜록은 꼭 그와 함께 자신이 맡은 사건 현장 조사에 나섰기 때문에 이번 갑작스런 부재는 존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존이 낮에 병원 일을 하고 있던 동안 그가 요 근래 맡았던 사건의 결정적인 단서(아마도 범인이)가 웨일스에서 발견된 모양이었다. 존에게 별다른 연락도 하지 못하고 급히 떠나야 했던 것을 보면. 딱히 서운하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민첩한 행동력과 위험에 빠지기를 주저하지 않는 모험심 강한 성격을 생각하면 5일 동안이나 연락이 없는 것이 조금 걱정되기는 했다. 바쁠 땐 텍스트에 답변도 주지 않는 셜록이라는 걸 잘 알기에 존은 그저 울리지 않는 핸드폰을 가끔씩 바라보며 낮에는 병원에 출근했다가 저녁때 돌아와서 신문을 보거나 노트북을 들여다보며 저녁을 먹는 생활에 익숙해져가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그 모든 것들에 질리고 말았다. 거실 문을 열었을 때, ‘…존, 왔나?’ 하는 예의 그 낮은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과 염기 용액이나 산화 물질 기타등등의 실험 용액 냄새로 뒤덮이지 않은 부엌과 거실을 가득 채우는 감미로운 바이올린 소리가 나지 않는 하숙집에.


 저녁거리가 다 떨어졌음을 텅 빈 냉장고로 확인한 순간, 존은 저도 모르게 ‘젠장, 셜록!’ 을 외쳤다. 그리고 냉장고가 빈 것과 셜록이 무슨 상관관계가 있나를 고민하다가 주저 없이 자켓을 들고 베이커가의 하숙집을 나와 택시를 탔다. 장을 보러 가야 한다는 생각도 했지만 모든 게 귀찮았던 그는 그건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느닷없이 셜록이 집으로 들이닥쳐 먹을 것을 찾는다면, 그야말로 낭패가 되겠지만. 그런 것조차 신경 쓰기 싫을 만큼 존은 엄청나게 지루해져 있었다.


 웨일스에서 뭘 하고 있는 걸까.


 구수한 냄새가 나는 로스트비프를 포크로 쿡쿡 찌르며 존은 한숨을 내쉬었다. 뭐지 이건, 마치 남자친구가 근사한 파티에 데려가지 않았다고 툴툴거리는 사춘기 소녀 같잖아.

 존은 셜록과 룸메이트가 되고 처음으로 함께 했던 한 달 전 그때를 떠올렸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돌아온 후 머물 곳이 없어 호텔을 전전하던 그때까지만 해도 앞으로 자신이 이런 삶을 살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었다. 가로등이 아름답게 반짝이고 지나가는 자동차들의 불빛이 아로새겨지는 노덤벌랜드가를 바라보며, 존은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 고요하고 평화로운 한때를 보내는 동안 어디선가 혼자 일각을 다투고 있을 셜록 생각에 조금 우울해지고 말았다. 셜록의 숙적이자 그를 너무나도 잘 아는 형인 마이크로프트가 존에게 처음 했던, 셜록과 함께 걸으면 전쟁터가 보인다던 말은 결코 틀린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자신은 지금 그 전쟁터를 함께 걷지 못해서 아쉬워하고 있었다. 존은 전쟁에서 잃은 수많은 동료들을 생각했다. 자신도 언젠가 그들처럼 되고 말 것이라고, 차라리 빠른 시일 내에 그렇게 되길 바란다고 생각하며 지낸 나날들은 또 얼마나 길었던가. 운이 좋아 다시 런던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혼자만 살아서 돌아왔다는, 마음 한 구석을 무겁게 누르는 죄책감은 은연중에 그를 괴롭게 했다. 셜록이 결코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산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와 함께 하고 싶어 하는 건, 그 삶의 방식이 자신이 몇 년간 살아왔던 방식과 가장 닮아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자신을 괴롭히는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덜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하다는 것을 존은 부인할 수 없었다. 마이크로프트의 말대로 셜록이 전쟁터를 걷는 이라면, 존은 그를 도와주는 군의관으로 계속 지낼 수 있으니까. 아주 오래 전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두 사람이 마치 실과 바늘과 같은 조합이라는 생각이 들자 존은 한껏 우울해진 가운데도 그런 스스로가 우스워 피식, 웃고 말았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TV 소리가 존을 현실로 되돌려 놓았다. 존은 그러고보니 룸메이트가 사라진 뒤 자신이 한 번도 TV를 켜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그랬지. 셜록은 TV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TV보다도 신문이나 인터넷 뉴스로 여러 가지 소식들을 접하는 데 익숙해 보였다. 그리고 TV소리는 시끄럽다는 것이 셜록의 주장이기도 했다. 그런 아름답지 못한 소리 대신 자신의 바이올린 연주나 들으라며 한 시간이 넘게 바이올린을 켠 적도 있었다. 물론 그 연주는 허드슨 부인의 ‘지금이 몇 시인 줄 알아요, 셜록?’ 하는 제지에 그만두고 말았지만. 고작 그와 함께 지낸 지 한 달여가 지났을 뿐인데, 많은 것이 습관처럼 붙어버렸다.


 채 먹지 못한 접시를 옆으로 치워 두고, 후식으로 부탁한 블랙커피를 홀짝이고 있으려니, 내일도 이렇게 저녁시간을 보내야 할 거라면 애초에 사라에게 가던가 아니면 셜록에게 전화를 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존은 조용한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말없이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전화를 건다는 생각을 하자 조금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지난 한 달 동안 많이 가까워졌다고 해서, 집 나간 남편 기다리는 부인 마냥 전화로 댁은 지금 어디 길래 연락도 없이 이리 집을 오래 비워? 라고 물어볼 만한 관계가 되었다고 까지는… 글쎄.

 으음, 하는 무거운 신음을 내뱉으며 존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려는데, 갑자기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핸드폰이 반짝였다.

 발신자는, 셜록이었다.

 깜짝 놀란 존은 얼마나 놀랬는지 떨리기까지 하는 손으로 확인 버튼을 눌러 텍스트를 열었다.


 [자네 사라한테 바람맞았나? - S.H]


 뭐? 아니야!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대답하고 만 존은 퍼뜩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펴보았다. 다행이 아무도 자신을 바라보지는 않았지만 전화를 하는 것도 아닌데 소리를 질러버린 스스로가 참으로 한심하게 느껴져 존은 붉어진 얼굴을 감추려 재빨리 고개를 숙이며 답장 버튼을 눌렀다.


 [느닷없이 그게 무슨 소리야? 그보다도, 자네 지금 어디야? - J.W]


 텍스트를 보내고 몇 초 지나지 않아 답장이 왔다.


 [아, 난 또. 자네가 엄청나게 심각한 얼굴로 핸드폰을 노려보고 있기에 바람이라도 맞았나 했지. - S.H]


 뭐라고? 존은 또다시 소리치고 말았다. 존은 셜록이 어디선가 자신을 감시라도 하고 있나 싶어서 재빨리 창밖의 노덤벌랜드가를 내다보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위에서부터 들려왔다.


“혼자 저녁 먹으러 나온 건가? 요리할 기운도 없어서 가까운 음식점이라도 갈까 했는데, 마침 잘 됐군.”

“셜록?”


 고개를 들어보니 그가 서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장갑을 낀 손, 지쳐보였지만 결코 총기만은 잃지 않은 회색 눈, 며칠 새에 부쩍 수척해진 얼굴의, 셜록 홈즈가.


“밖에서 보니 엄청 심각한 얼굴로 앉아 있기에 그냥 지나칠 수가 있어야지.”


 존이 앉아있던 곳의 맞은편에 털썩 자리한 그는 손을 들어 젊은 청년을 불렀다. 아아, 빌리. 잘 있었나. 나도 이 신사분이 시킨 거랑 같은 걸 갖다 주게. 안젤로에게 내가 왔다고도 전해주겠나. 고맙네. 따뜻한 물컵에 손을 녹이며 셜록은 졸린 듯이 몇 번 눈을 깜박였다. 존은, 우습게도, 방금 전까지 혼자 앉아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게, 지금 자신이 룸메이트의 귀환을 기뻐하며 즐거운 기분이 되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다.


“젠장, 셜록.”

“왜 그렇게 웃는 거지.”


 룸메이트의 순수하게 기뻐하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셜록은 눈살을 찌푸리며 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미소가 금방 어색해져버린 존도 재빨리 표정을 거두고는 짐짓 심각한 얼굴을 해 보였다.


“대체 어디 갔었던 거야? 그것도 5일이나?”

“웨일스에 간다고 했잖아. 메모 못 봤나보군.”

“아니, 봤어. 그렇지만 5일이나 걸린다는 말은 없었잖아. 내가 얼마나-”

“얼마나?”


 존은 꼴깍, 물을 마시는 셜록의 얼굴을 보며 결국 말끝을 흐렸다. 아니- 그냥 그렇다고.

 당신 오늘 좀 어딘가 이상한 것 같다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던 셜록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한껏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범인을 추적하는 게 의외로 시간이 좀 걸렸어. 단서는 하루 만에 잡았는데 사흘이나 녀석이 몸을 사릴 줄이야. 방금 전에 겨우 붙잡아서 담당 형사에게 넘기고 오는 길이네. 근데 자네, 5일 동안 뭐 했나?”

“5일- 동안? 뭐 했냐고?”


 고개를 끄덕이는 셜록은 빌리가 내미는 로스트비프 접시를 앞에 놓고 포크로 구운 감자를 헤집기 시작했다. 당황한 존은 에- 그러니까- 그냥,

 부엌 청소도 좀 하고. 신문 보고. 블로그에 글도 쓰고. 그랬는데.

 하자 셜록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그렇다면 무척이나 지루했겠군.”


 정곡으로 찌르는 셜록의 말에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던 존은 울컥하는 기분과 긍정하는 마음이 저 밑바닥서부터 꿈틀거려 결국 “당연하지!!!” 라고 그를 향해 냅다 소리 지르고 말았다.


“마침 잘 되었네. 셜록. 오늘 밤은 지루하지 않겠군. 자네가 방금 전에 해결한 사건에 대해 나에게 설명해줄 것을 기대하겠어. 내 블로그의 독자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말야.”

“존- 그 지루한 블로그는 그만둬. 난 내가 해결한 사건이 왜곡되고 미화되는 건 정말 볼 수가 없으니까-”

“누가 뭐래도 난, 사건 그대로 독자들에게 전달할 뿐이라고!”


 묵묵히 나이프와 포크를 놀리는 셜록에게 이런저런 잔소리를 늘어놓으며, 비록 그것이 남이 보면 정말 집 나간 남편이 돌아오자마자 잔소리하는 부인 같아 보였을지 몰라도, 존은 더 이상 지루하고 따분한 베이커가의 하숙집에 홀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안도했다. 현관문을 열었을 때, 죽음의 망령이 아닌, 살아있는 젊고 괴팍하고 똑똑한 탐정 셜록 홈즈가 자신을 (지루하지 않은 삶 속으로) 맞이해줄 것은 앞으로도 변함없을 테니. 어떤 전장이라도 함께 걸어주겠어! 라는 조금 유치한 생각까지 하면서, 자신과 함께하는 사람이 그여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저 멀리서 안젤로가 셜록의 이름을 부르며 로맨틱한 연인들 전용 양초를-이미 불이 켜져 있었다!-두 개나 들고 오는 모습을 보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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