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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 2010. 10. 13. 12:30

셜존 :: Clara



 거실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의학 관련 서적을 차곡차곡 쌓아 방으로 가져가려다 말고, 나는 벽난로 위에 놓여 있는 그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손바닥만한 그 그림은 그녀의 생일날 해리엇이 선물한 그녀의 초상화였다. 이런 말을 하면 분명 해리엇은 화를 내겠지만, 초상화는 실제 그녀의 얼굴보다 조금 더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구불거리는 머리카락과 홀쭉한 두 뺨, 가느다란 입술 끝에 조용한 미소를 머금은 그녀. 깊이 있는 두 눈은 그림 속에서도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해리엇을 바라볼 때 그런 미소를 짓는다는 것을 안다. 나는 적어도 그 초상화를 그린 사람이 모르는 그녀에 대한 사실을 대여섯 개 쯤 더 알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옅은 갈색이라는 것도, 그녀의 볼에 있었던 작은 주근깨들이 햇빛을 받으면 조금 짙어 진다는 것도, 그녀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아니, 난 괜찮아. 정말이야.’ 라는 것도.


 하지만 그녀는- 내가 이 거실에서 조용히 책을 펼쳐들고 있는 이유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는 낱말들을 억지로 끄적이고 있는 이유가, 오로지 그녀 자신의 모습을 보기 위한 하나의 위장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Clara

for 가므 님

 

 


 

 내가 막 대학교에서 의학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육군 외과의가 되기 위해 훈련 학교에 입소하기를 결정했을 때였다. 해리엇에게서 괜찮다면 일주일간의 일정으로 놀러오지 않겠냐는 연락을 받았다. 중요한 할 이야기가 있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나는 런던 대학교에 입학한 이후로 몇 년 동안 대학교의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었고 그녀는 아버지의 소유였던 런던 교외의 낡고 작은 이층집을 물려받아 그 곳에서 계속 지내고 있었다. 우리는 평소에 사이가 좋았던 남매지간은 아니어서 서로의 안부를 묻거나 하는 일에 인색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거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고 해도 좋았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그런 갑작스런 제안이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어차피 훈련 학교에 입소하게 되면 꽤 오랫동안 얼굴을 볼 수 없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의학 관련 서적 몇 권과 일주일 간 생활하는데 필요한 옷가지, 생필품들을 챙겨들고 찾아간 옛 집은 몇 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막 그곳을 떠나 런던 시내로 거처를 옮겼던 때와 거의 달라진 것이 없었다. 어릴 때 뛰어 놀았던 너른 정원에 잔디가 무성한 것을 보며 나는 여전히 해리엇이 그 집에서 게으르게 지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우리가 만나지 않았던 시간들 속에서 그녀가 얼마나 변해 있을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조금 즐거운 기분으로 현관문 앞에 서서 가방을 내려놓고 힘차게 초인종을 눌러 그녀와의 조우를 기다렸는데.


 - 아, 존 왓슨 씨?


 문을 열고 나온 것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처음 보는 여성이 나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뒤이어 얼굴 가득 함박웃음을 지었다. 나는 너무나도 순수해 보이는 그 미소에 사로잡혀 영문도 모른 채 그녀의 포옹을 받아들였다.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과 목덜미에선 옅은 장미꽃잎 향기가 났다.


 - 말로만 들었는데 실제로 보니 제가 상상했던 것과 너무 비슷해서 깜짝 놀랐어요.

 - 아, 저, 실례지만…

 - 아, 소개가 늦었네요. 전 클라라라고 해요. 해리엇의 친구죠.


 해리엇의 인간관계를 잘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해리엇의 친구 리스트에 그녀와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그녀와 함께 2층의 테라스로 올라갔고 거기서 친구들에 둘러싸인 해리엇을 보았다. 그녀는 못 본 사이에 많이 말라 있었고 얼굴에는 지울 수 없는 세월의 흔적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러나 활달하고 씩씩한 성격만큼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어, 흔히 기가 센 누나 형제 밑에서 자란 동생들이 그렇듯이, 나는 이전처럼 조금 주눅이 든 모습으로 그녀를 대했다. 해리엇과 반갑게 인사를 하고 난 이후의 기억은 정신이 없어 제대로 기억나지 않지만 해리엇을 위해 모인 그녀 친구들과 일일이 인사를 주고받으며 소소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던 것 같다. 그런 뒤 이전에 사용하던 2층의 내 방에 짐을 풀고 침대에 걸터앉아 추억에 잠겨 이런 저런 것들을 생각하다가 나는 긴장이 풀려 깜박 잠이 들고 말았다.

 

 눈을 떴을 땐 이미 해가 저물어 있었다. 소란스러울 것을 예상하며 2층 거실로 나왔는데,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잘 정리된 벽난로에선 방금 넣었는지 막 타기 시작한 나무들이 집 안의 공기를 훈훈하게 데워주고 있었다. 벽에 걸린 사진들이나, 낡은 가구들은 모두 이전과 그대로여서 나는 잠시 그것들을 구경하고 있는데 등 뒤에서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해리엇일거라 예상하고 뒤를 돌아보니 그곳엔 자신을 클라라라고 소개한 여인이 서 있었다.


 - 오, 아까 문을 두드렸는데 기척이 없기에 자고 있는 줄 알았어요.

 - 제가 깜빡 졸았군요. 그런데 친구 분들은?

 - 모두 돌아갔어요. 곧 다시 모일 예정이지만.


 친구들은 모두 가고 없다는데 그녀만이 남아있다는 것이 조금 이상했지만, 한편으로 상냥한 그녀와의 독대가 마음에 들었기에 나는 기쁜 기색을 감추기 위해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커다란 그녀의 눈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두 눈을 마주보고 대화를 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그녀가 분명 온화하고 깊고 올곧은 성품을 지닌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 해리는 좋은 친구를 뒀군요.


 솔직한 감상이었지만 나는 내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는 줄도 모르고 있다가 뒤늦게 당황하고 말았다. 내 말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재밌다는 듯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네요. 해리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난 그녀를 만나고 난 뒤부터 웃을 일이 많아졌거든요. 저기 저 초상화도 해리가 선물해 준거랍니다.


 그녀가 가리킨 벽난로 위에는 아까 미처 보지 못한 초상화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것은 목탄으로 그린 클라라의 초상화였다. 생일 선물로 초상화를 받은 것은 처음이라고 말하는 클라라의 목소리엔 숨길 수 없는 기쁨이 가득 담겨 있었다. 나는 해리에게서 그런 상냥한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에 조금 의외였다.


 해리엇에 대해 그녀가 내리는 평가를 듣고 있으려니 내 누나 해리엇이 아닌 다른 해리엇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녀는 진심을 다해 누나의 좋은 점에 대해 내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다 보니 난 해리엇이 아닌 그녀 쪽이 매우 좋은 사람이라는 확신이 점점 더 들기 시작했다.


 우리는 한참을 서서 해리와 이 집과 내 일과 런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와 나는 이야기가 잘 통하는 편이어서 나는 그것이 무엇보다도 기뻤다. 그녀는 내가 군의관이 될 것이라고 말하자 진심으로 걱정하는 표정을 지었다. 전장에 나가 있을 나를 위해 기도하겠다는 이야기를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말하는 내내 그녀는 예의 그 상냥한 미소를 잃지 않았고 그 미소에 취해있던 나는 결국 내가 그 짧은 만남만으로 그녀의 목소리, 몸짓, 말투 등에 온통 매료되어 버렸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능하다면 그 미소를 오랫동안 곁에 두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내가 바보 같은 대사를 막 내뱉으려던 찰나, 그녀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 아, 배고프죠? 스튜를 만들어 뒀다는 얘기를 하려고 올라온 건데. 깜박 했네요. 괜찮다면 내려오세요. 식사 안 했잖아요.

 - 아… 저는……

 - 해리랑 저는 이미 식사했으니까 1인분만 차리면 되요. 금방 준비할 테니까, 내려오세요-.


 나는 배가 고픈지 어떤지도 알지 못했지만 그녀의 권고대로 하겠다고 대답하고는 그녀의 내려가는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해리가 어떻게 저런 친구를 둔 거지? 대화를 나눠보니 클라라는 그녀와는 상반되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게으르고 술을 좋아하고 독단적인 기질이 있는 해리와 달리 클라라는 요리하는 것을 좋아하고 독서가 취미인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물론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에 더 친해질 수도 있는 거겠지만. 나는 벽난로 앞 소파에 앉아 잠시 그녀에 대해 생각했다. 클라라의 것으로 보이는 소설책 몇 권이- 해리는 전혀 책을 좋아하지 않았다 -눈앞의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나는 그것을 뒤적이다가 그 틈에 끼어있는 웨딩드레스와 결혼식 피로연을 장식할 플라워 아트에 대한 책들을 몇 권 발견하고 조금 충격을 받았다.


  결혼?


  나는 해리엇이 나를 부른 이유를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우리가 몇 년 만에 마주하게 된 진정한 이유를. 궁금증을 참지 못한 나는 그녀에게 직접 물어보기 위해 재빨리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1층 거실을 지나 부엌과 거실의 경계를 잇는 벽 모퉁이를 막 돌았을 때, 나는 큰소리로 해리엇의 이름을 부르려다 내 눈 앞의 광경을 보고 바보같이 입만 벙긋거렸다. 그리고 재빨리 뒤를 돌아 내려오지 않았던 것처럼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다시 올라갔다.


 2층 거실에 도착해 다리에 힘이 풀려 소파에 주저앉았을 때, 나는 웃고 있었다. 실성한 사람처럼 입술 사이로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그칠 수가 없었다. 방금 전까지 클라라와 즐거운 대화를 나누고 혼자만의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던 스스로가 한없이 우습게 느껴졌다.

 

 부엌의 모퉁이를 막 돌았을 때, 그곳에는 해리가 있었다. 그리고 클라라도.


 두 사람은 서로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깊고 부드럽게 입맞추고 있었다. 해리의 손이 클라라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그녀의 목을 감싸 안는 것을 본 나는 그제야 클라라가 다른 친구들과 달리 이 집에 남아있는 이유를 깨달았다. 그것은 내가 본 결혼식, 웨딩드레스 관련 책자와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난데없는 달리기를 하느라 거칠어진 호흡을 가라앉히고 겨우 진정했을 때, 나는 저 아래에서 클라라와 해리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들었다. 또다시 피식, 쓴웃음이 새어나왔다.

 

 

 클라라와 해리는- 두 사람은, 연인 사이였다.

 

 나는 정말로, 나 자신이 바보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

 

 

  일말의 희망을 품었다가 그것이 해리엇에 의해 산산조각 났던 그 날 저녁, 두 사람은 식탁 앞에서 모든 것을 이야기 해 주었다. 나는 넘어가지 않는 스튜를 억지로 삼키면서 그 둘이 곧 결혼할 예정이며 나를 참석시키기 위해 일부러 결혼 예정 날짜도 당겼다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낮에 왔던 친구들은 결혼식의 들러리로 설 친구들이었고 식은 이 집에서 할 예정이라 사흘 뒤, 그러니까 결혼식 전날 사람들을 불러 곳곳을 꽃으로 장식할 거라고 했다. 거기까지 이야기 했을 때, 나는 더 이상 먹을 수가 없어 스푼을 내려놓았다. 좋지 않은 표정을 감추려 애쓴 덕에 클라라는 나에게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하고 예의 그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 존, 당신이 우리 결혼식의 증인이 되어 주었으면 해요.


 한숨을 내쉬며 나는 그러겠노라고 했다.

 

 두 사람은 사이가 매우 좋아 보였다. 해리엇이 커밍아웃을 한 것은 시간이 지나자 조금의 충격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두 사람은 마치 이전부터 깊은 연인사이였던 것처럼- 물론 그랬겠지만 -오로지 서로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제 3자가 되어 그녀를 자연스럽게 관찰할 수 있었다. 동생에 대한 믿음보다 클라라에 대한 믿음이 더 컸기 때문에 아마도 해리는 나와 클라라가 함께 있는 것을 용납했을 것이다. 그 무신경함이 고마웠지만 그렇다고 해서 클라라에 대한 내 마음이 사그라들거나 하진 않았기에 나는 더욱더 괴로워져만 갔다. 그녀의 사랑스러운 얼굴이 해리를 향할 때마다, 나는 그것을 애써 보지 못한 척 하며 무릎위에 놓인 책 위로 눈길을 떨구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내가, 그녀의 뒷모습과 가끔 홍조를 띄는 부드러운 두 뺨과 젖은 입술을 보고 있었다는 것을 그녀가 알아채지 못하도록 숨기는 데 점점 더 능숙해지고 있다는 걸 자각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죄책감에 휩싸여 나 자신에게 속삭였다. 이 결혼식이 끝나고 훈련소에 입소하게 되면, 분명 언제 그랬냐는 듯 자연스럽게 시들고 말 감정이라고. 그러니 제발 멍청하게 굴지 말고 그만 시선을 거두라고.


 그리고 그 노력은 조금의 보람도 얻지 못했다.

 

 

∵∴∵

 

 

 결 혼식 하루 전날이었다. 그 날은 마침 런던 시내에 볼 일이 있어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가 친구를 만나고 저녁 늦게 돌아갈 예정이었다. 만약 약속이 없었더라도 나는 해리와 클라라를 위한 플라워 아트가 집을 가득 채우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일부러라도 집에 늦게 돌아갈 약속을 만들 생각이었다. 어젯밤 클라라는 배달해 온 드레스를 받아들고 무척이나 기뻐했다. 분명 그것을 입은 클라라는 아름다울 것이다. 나는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친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밤늦게까지 술을 마셨다. 그리고 비틀거리는 몸을 가누며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어둠 속에서 앞마당에 놓인 화환 장식들을 흘끔거리며 집으로 들어서는데, 이상하게도 집안은 온통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거실 불을 켜려고 더듬거리며 스위치를 찾는데 2층에서 무언가 와장창하고 깨지는 소리가 났다. 꺼져버려! 해리의 고함소리에 나는 주저하지 않고 2층 계단으로 뛰어올라갔다. 그리고 온통 난장판이 된 물건들 속에 주저앉아 있는 클라라를 발견했다.


 - 클라라, 괜찮아요?


 내 물음에 그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았다. 그저 망연하게 그 자리에 앉아있을 뿐이었다. 거실의 불을 켠 나는 그녀의 다리에서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몸은 작게 떨리고 있었다.


 - 클라라? 대체 무슨 일이에요?

 - 괜찮아요, 존. 난 괜찮으니까… 해리를, 해리를….


 그녀는 팔을 들어 2층 테라스를 가리켰다. 그곳엔 해리가 힘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나는 재빨리 그녀에게 다가가 맥을 짚어본 후 그녀가 다행히도 그저 기절했을 뿐이라는 걸 알았다. 나는 해리의 뺨을 두들겼지만 그녀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해리에게선 독한 술 냄새가 났고 그것이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외상을 입지 않은 듯 보였고 그래서 나는 다시 클라라에게 가 재빨리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것으로 그녀의 다리를 지혈했다. 날카로운 물건에 벤 것인지 상처는 깨끗했지만 피가 많이 흐르고 있었다. 해리는 단순히 술에 취한 것이니 만큼 그냥 두면 나중에 깨어날 테니 급한 건 약한 쇼크 상태에 빠진 클라라를 진정시키는 일이었다.


 나는 사방에 깨지고 박살나있는 위험한 물건들을 대충 밀어낸 뒤 그녀를 소파에 앉히고 나서야 조금 안도했다. 그리고 떨어지고 부서진 물건들 틈에서 그녀의 초상화를 발견했다. 액자의 유리는 산산조각나 있었다. 나는 그것을 잔해들 속에서 꺼내 벽난로 위에 올려놓았다.


 그런 나를 말없이 바라보던 클라라는 내가 그녀에게 다가가자 결국 참고 있던 눈물을 터트리고 말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녀를 끌어안고선 살며시 등을 토닥여주었다. 마치 꼭 외워야 하는 주문처럼 ‘진정해요- 클라라,’를 쉬지 않고 중얼거리며.

 

 

 

 

 

“해리엇은 술버릇이 나빴어. 셜록, 네가 추리한대로. 그래서 알콜 중독자들을 위한 상담을 받기도 했지. 난 그녀가 다 나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봐. 결혼식 전날이라 기분이 좋아진 해리가 클라라 몰래 숨겨두었던 술을 꺼내 마신거야. 드레스를 정리하고 마지막으로 집안 점검을 하던 클라라가 2층에서 취한 해리를 발견했고 봉변을 당한 거지.”


 긴 소파에 앉아 내 말을 경청하던 셜록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핸드폰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클라라가 해리와 헤어지기 몇 달 전에 마지막으로 선물했던 그것을. 그것은 결국 내 손으로 들어왔지만, 사실 내 과거의 일들이 내게 주는 무게감은 이미 그 핸드폰의 무게보다 한없이 가벼워져서 이미 오래전 낡은 기억들 중 하나가 되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결혼식은 못 했겠군. 집안은 난장판이었을 테니 그것들 정리하느라 고생했을 테고, 보통 그런 것들을 하루 만에 복구하기란 어려우니까. 그리고 다리에 상처가 난 채로 결혼식을 하고 싶어 하는 신부는 없지.”


 나는 그의 말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몇 달 뒤에 내가 훈련학교에 있을 때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었네. 그리고 그게 그녀들과 나에게 있었던 일 전부야. 이후로 제대하기까지 난 그녀들을 만나지 못했고 그녀들 또한 나에게 연락하지 않았어.”


 

 내 블로그에 남긴 해리엇의 메시지를 본 셜록이 ‘클라라에게 눈독을 들인 것이 사실이냐’ 는 난데없는 질문을 하는 통에 어쩔 수 없이 털어놓게 된 이야기는 예상외로 길어져서 저녁식사를 하고 커피까지 한 잔 마신 후에야 겨우 끝이 났다. 나는 그가 자신의 블로그를 정리하다가 귀찮아져서 내 블로그로 넘어왔고 그러다가 내 사생활 이야기에 호기심이 동해 나에게 그런 질문을 한 것이라는 걸 안다. 그는 지금 무척 지루한 상태였고 조금이라도 머리를 굴릴 수 있을 만한 소재거리를 찾고 있었으니까.


 덕분에 지쳐버린 나는 이야기를 끝맺고 이제 그만하자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두 손을 모으고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셜록이 던진 질문에 또 다시 그만 발이 묶이고 말았다.


“존, 자네가 해리의 여자 친구를 좋아했다는 것 때문에 죄책감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은 잘 알겠어. 하지만 단순히 그것 때문에 해리와 클라라가 헤어진 지금도 해리를 피한다는 것은 잘 납득이 가지 않아. 그리고 해리는 자네가 클라라를 좋아했다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기에 블로그에 그런 말을 쓴 거지? 자네가 해리에게 고백했나?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지금 이야기에 뭔가 빠진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네. 존.”


 나는 이를 악물고 셜록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무표정하고 차가운 얼굴과 시선이 마주쳤지만 그는 조금의 양보도 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애초에 이야기를 시작한 내가 잘못이겠지만, 그래도 이건 정말 너무했다. 대체 왜 이제 와서 옛 사랑 이야기를 추궁당해야 한단 말인가? 나는 나중에 이 고난을 치르게 만든 댓가를 빌과 해리에게 톡톡히 치르게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셜록은 내가 곤란해 하고 있다는 것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 기세로 자신의 생각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존, 해리가 술을 마시고 난동을 부린 날에, 자네 클라라와 무슨 일이 있었던 게-”

그만! 셜록. 난 더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

 

 갑자기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것을 느끼며 나는 셜록에게 소리 질렀다. 오- 제발. 아무리 자네가 관찰과 추리의 대가라고 해도 내게 이럴 자격은 없어! 그러나 그는 그런 내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의 추리를 꺼내놓았다.


“혹시 그녀를 위로하다가 그녀랑-”


 발광하는 미치광이처럼 소리 지르다가 나는 나도 모르게 셜록의 다음 말에 꽥꽥거리고 말았다.


“키스했나?”


 젠장.


“그래! 했어! 했다고! 이제 됐나? 그걸 클라라가 해리에게 나중에 말해버려서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도망치듯 그 집을 나온 뒤로 정말 생각하고 싶지 않았건만 왜 자꾸 묻는 거야!!!”


 아래층에서 금방이라도 허드슨 부인이 뛰어 올라올만한 기세로 버럭대고 나니 나는 현기증마저 느꼈다. 동시에 셜록의 얼굴을 보기가 민망해졌다는 것을 깨닫고 재빨리 뒤를 돌아 후하후하 호흡을 가다듬었다. 사방이 조용했다. 등 뒤에서 셜록의 ‘흐-음.’ 하는 탄식 비슷한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재빨리 머리와 눈을 돌려 그의 얼굴을 힐끔 보았다. 그는 아까 보았던 두 손을 모은 그 포즈 그대로 천천히, 매우 느릿하게 중얼거렸다.


키스-했다는 거군. 키스. 클라라랑.”


 오, 하느님. 거기 계시다면 셜록을 제발 좀 말려주세요.

 머리를 감싸 쥐고 괴로워하는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마치 위로하듯 내게 말했다.


“남녀 간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일은 패턴이 비슷해서 추리하기도 쉽지. 그러나 가장 쉬운 듯하면서도 변수가 많은 게 치정 싸움에서 벌어지는 범죄야. 덕분에 도움이 좀 되었네, 존.”


 … 힘들여서 길게 이야기하게 해 놓고 내 과거 이야기를 한낱 ‘치정싸움’ 운운하며 간단하게 정리해버리는 저 셜록이라는 작자가 얄미워서 나는 있는 힘껏 그를 노려보았다.(슬프게도 그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리고 그를 곤란하게 만들 질문이 없나 머리를 굴리려 애쓰다가 문득 유치하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내가 당한 고난을 고스란히 되돌려 주기 위해 그에게 소리쳤다.


“자네는! 자네는 그런 경험이 없다는 건가?”


 셜록은 부엌으로 걸어가다 말고 다시 되돌아왔다. 그리고는 왠지 모르게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음-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그런 것들에 관심이 없네. 그래도 굳이 들어야 겠다면-”

“겠다면?”


  그의 긴 팔이 내 허리를 휘감는다. 불시의 공격에 나는 저항도 하지 못한 채 휘청거리며 그의 팔을 붙잡았다.


“…나중에 얘기해주지. 그리고 존, 과거의 사랑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니네. 중요한 건 지금 어떤 사랑을 하고 있느냐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하여튼 도망가는 데는 선수라니까. 나는 셜록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조금 메마른 셜록의 입술과 상반되는 부드러운 혀끝에선 방금 마신 쓰고 진한 커피 맛이 났다. 그는 그 순간만큼은 내가 옛 사랑의 키스 따위는 생각할 수도 없게 만들었다. 머릿속이 멍해지는 키스도 잠시, 아쉬운 듯 떨어진 입술을 손가락 끝으로 매만지며 셜록은 입가에 미소를 띄운 채 한 손에 머그잔을 들고 부엌으로 사라졌다.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클라라의 키스 자국이 선명한 핸드폰을 나는 잠시 내려다보다가 그것을 뒷주머니에 넣었다.

 

 이젠 잘 기억나지도 않는 그녀와의 키스는, 부디 앞으로 나눌 수천 번의 키스에 묻혀 사라져 버리길.


 그리고 그녀가- 더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하길.



 나는 그저 그렇게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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