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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 2011. 8. 16. 09:00

셜록 :: 운수 좋은 날





  로라 코트너는 오늘 하루가 범상치 않을 것임을 일찌감치 예감했다. 그러나 그저 예감했을 뿐, 그녀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은 없었기에 그녀는 해일처럼 밀려드는 악운을 고스란히 맞아야 했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별 일 아니었지만, 흔히 그런 별 거 아닌 일들은 연속적으로 일어나기에 문제가 된다. 아침에 일어나 우유와 식빵 한 조각을 먹으려는데 토스터가 누전으로 폭발하거나, 깜짝 놀라 잠시 넋이 나가는 바람에 칼같이 지키는 출근 시간에 10분 늦게 되는 뭐 그런 것 말이다. 서둘러 나오는 길에 우산을 잊어버려 1월의 변덕스런 날씨의 심술에 당하기도 했으며, 지하철 계단을 오르다가 빗물에 하마터면 미끄러져 크게 다칠 뻔도 했다.(미끄러지려는 찰나 옆 난간을 붙잡을 수 있었다.) 그래도 다치지는 않았으니 하늘에 감사하며 일진이 그리 나쁘지 않구나, 하고 생각해야 맞겠지만, 그녀는 그러는 대신, 토튼햄 코트가에 있는 아치웨이 수영장, 즉, 자신의 일터에 도착하자마자 절망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의 근원은, 오늘의 일정표와 관련된 것이었다.


  이건 정말 일진이 나쁘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아침부터 여러가지 일들이 일어나는 바람에 정신이 없어 미처 생각하지도 못했지만, 오늘은 목요일이었던 것이다. 목요일은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수영 강습 프로그램이 오전 10시부터 있는 날이었다. 지난주부터 시작한 주 2회의 이 프로그램에 배치된 로라는 처음으로 수영 강사로서의 자부심이 바닥을 치는 것을 느꼈다. 이 추운 날에, 방학을 맞아 아이들에게 굳이 수영을 가르치려 드는 극성맞은 어머니들은 많았고 그 아이들은 그 어머니들의 세 배쯤 극성맞아 로라를 괴롭혔기 때문이었다.


  지난 1년간 성인들을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에만 배치되다가 처음으로 아이들을 상대로 강습을 하려니 힘든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아이들은 말도 잘 안 들었고 툭하면 사고를 치기 일쑤였다. 지난주에만 해도 로라의 눈을 피해 1미터 50센치 정도 높이 밖에 안 되는 어린이 전용 수영장에서 다이빙 놀이를 하다가 발목을 세게 접질린 아이가 있었다. 게다가 준비운동을 시키면 제대로 따라하는 아이는 열다섯 명 중 다섯 명도 안 됐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군기를 잡는 스타일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해서 아이들에게 서글서글하게 대하는 스타일도 아니었기 때문에 더 힘들게 느껴지는지도 몰랐다. 어떻게 아이들을 다루어야 하는지 모른다고 하는 게 맞았다.


  수영을 배우러 온 거면 제대로 강사의 말에 따라 주어야 할 것 아냐! 

  첫 강습이 끝난 뒤 탈의실 의자에 앉아 울분을 토로하는 로라의 모습을 본 제이미 로렌스는 아이들이야 다 그런 거라고 그녀를 위로했지만, 로라는 고작 응급요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자신보다 다섯 살이나 더 어린 청년에게 그런 위로를 받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이 더더욱 한심하게 느껴져서 결국 펑펑 울고 말았다.


  그땐 정말 창피했어…. 사물함을 열어 가방을 넣던 로라는 저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 느꼈다. 할 수 있다면 사물함에 머리를 넣고 닫아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다행이도 오늘 제이미는 쉬는 날이었다. 분명 오늘도 고군분투 할 텐데 자신의 그런 한심스런 모습을 또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갑자기 왜 이렇게 제이미를 의식하게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잽싸게 긴팔 트레이닝복과 반바지로 갈아입은 로라는 호루라기를 목에 걸며 새로운 각오를 다졌다. 소리를 질러서라도, 아이들에게 절대 지지 않겠어! 두 손을 불끈 쥐었다.

 



  그러나 세 시간 뒤, 로라는 벌개진 눈으로 조퇴를 해야겠다며 그녀의 선임자인 제시 카터를 찾아갔다. 방금 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보고받은 제시는 그녀를 위로하며 그러라고 했다. 한 시간 전, 로라의 눈을 피해 누가 누가 더 오래 물속에서 숨을 참나 내기하던 두 꼬마 중 한 명이, 그대로 꼬르륵 물을 먹고 파랗게 질리는 바람에 일대 혼란이 있었다. 로라의 응급처치가 빨라 그나마 아이는 물을 토해내고 살아났지만, 그런 사고가 지난 주에 이어 이번 주에도 연이어 일어나자 로라는 그것이 자신의 부주의 때문이라는 죄책감을 떨쳐낼 수 없었다. 


 


  사물함에 제 머리통 대신 젖은 수건을 던져 넣고, 잔뜩 지쳐버린 로라는 젖은 갈색 머리를 말릴 새도 없이 바지만 청바지로 겨우 갈아입고 탈의실을 나왔다. 분실물로 습득해 둔 우산들 중 아무거나 꺼내 수영장을 나섰지만 그런 그녀를 비웃듯 하늘은 쨍쨍했다. 로라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빨리 기분 전환을 하던가, 아니면 그냥 집에 가서 잠이나 자고 싶었다. 하지만 둘 다 마음에 안 들었다. 이래가지고는 달라지는 것 없이 다음 주 월요일에 있을 초등부 수영 강습 프로그램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질 게 뻔했다. 아이들은 말썽을 피우고, 자신은 애를 먹겠지. 어쩌면 제이미의 앞에서 난처한 지경에 처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만은 제발!


  지하철역으로 향하던 로라는 핸드폰을 꺼내 그녀의 친구인 클라라 모건에게 전화했다. 그녀는 현재 휴직 상태이긴 하지만, 작년까지 초등부 교사로 일했으니 로라의 딱한 사정을 알면 아이들을 다루는 방법에 대해 조언해줄 수 있을 것이다. 예상대로 클라라는 흔쾌히 그녀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고, 로라는 기뻐하며 방향을 바꿔 근처의 마트로 향했다. 클라라의 집은 토튼햄 코트가에서 걸어서 20분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간식거리라도 사가야겠다. 아니, 술을 사갈까? 하지만 점심시간인데 너무 이르다고 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녀는 정말 당장이라도 술에 취하고 싶을 정도로 우울했다.




  테스코에는 점심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제법 많았다. 그녀도 종종 장을 보러 오는 이곳은 런던 시내 한복판에 있는데다가 매우 규모가 커서 1층만 다 둘러보는데도 시간이 꽤 걸리는 곳이었다. 사람들이 체증을 일으키는 계산대를 보며 혀를 내두른 로라는, 서둘러서 사가지고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카트 대신 장바구니를 들고 과자 코너를 기웃거리던 그녀는 차와 함께 곁들일 비스킷 몇 개와 클라라가 좋아하는 초콜릿을 담았고, 유제품 코너와 과일 코너를 돌며 자신이 마실 요구르트와 일곱 개 들이 사과 한 봉지를 마저 담았다.


  그것만으로도 꽤 무거워서, 뭔가를 더 추가하고 싶었지만 과연 들고 갈 수 있을까 고민하던 로라는 추가로 빵이나 더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곤 베이커리 코너에 가려고 몸을 돌리다가 빠른 속도로 지나가던 한 남자와 하마터면 부딪칠 뻔했다.


“오, 미안해요.”


  로라는 그 자리에 뻣뻣이 굳어버렸고 아슬아슬하게 그녀를 피한 파란 코트의 남자는 로라의 사과에 가볍게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괜찮다는 의미였겠지만, 사실 사과해야 할 건 로라가 아니라 가뜩이나 좁은 마트 코너를 거의 달리듯이 걷고 있던 남자 쪽이었거늘. 그녀는 뒤늦게 짜증이 났다. 그러나 남자는 그새 모습을 감추어 버린 상태였다. 짜증을 삭히며 로라는 천천히 베이커리 코너로 향하다가 또다시 이상한 광경을 보았다. 사라졌던 그 남자가 다시 나타난 것이었다.


  검은 곱슬머리에 짙은 파란 코트를 입은 남자는 키가 컸지만 행동거지는 몹시도 날렵했다. 그는 로라의 바로 눈앞에서, 빠른 걸음으로 다른 코너 틈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지기를 여러 번 반복하고 있었다. 그가 걸을 때마다 긴 코트 자락이 맵시 좋게 펄럭였다. 미간을 잔뜩 찌푸려 그리 인상이 좋아 보이지 않는 남자는, 답답했는지 장갑을 벗어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그는 꼭 누구를 찾는 것처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남자의 행동에 흥미를 느낀 로라는 그 자리에 서서 한참동안 그를 눈으로 쫓았다. 정말 바람 같은 속도였다. 대체 그가 왜 그러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모습은 솔직히 시선을 빼앗길 정도로 멋있어서, 로라는 방금 전 일어났던 짜증이 조금 누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남자가 부딪칠 뻔하며 민폐를 끼치고 있는 건 로라 뿐이 아니었다. “위험하잖아요!” 낮은 비명이 남자가 사라진 코너에서 들려왔고, 로라는 일부러 그 앞을 지나가며 남자의 뒷모습을 흘끔거렸다. 그는 화가 난 사람처럼 기세 좋게 마트 안을 활보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다시 나타나 로라의 옆을 지나쳤다. “젠장!” 로라는 그 남자의 화가 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귓가에 속삭이면 어떤 여자라도 얼어붙어버릴 것만 같은 저음이었다. 남자가 뱉은 말이 욕설이라는 것도 잊게 만들 목소리. 로라는 등 뒤로 소름이 쫘악 끼치는 걸 느끼며 저도 모르게 남자의 뒤를 쫓아 베이커리 코너로 들어갔다. 그러나 남자가 찾는 것은 거기에도 없었던 모양인지, 남자는 빠르게 로라의 옆을 지나 다른 코너로 향했다. 남자의 정면 얼굴을 다시 본 로라는 이번엔 그의 날카로운 시선에 관통 당하고 말았다. 일순 심장이 멈춘 듯했다.


  빨리 간식거리를 사고 나가려 했는데, 난 대체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람. 로라는 제 뺨을 부비며 다른 데 시선을 빼앗겨 넋을 잃은 자신의 행동을 뒤늦게 후회했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남자가 사라진 곳에 머물러 있었다. 몇 초, 아니, 몇 분이 지나고, 그가 돌아오지 않을 거란 확신이 들었을 때, 로라는 가까스로 진열대로 시선을 옮길 수 있었다. 그리고는 블루베리 머핀이 담긴 봉지를 집어 바구니에 넣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마트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의미를 알 수 없는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이 “비켜!” 라는 목소리라는 걸 알았을 때, 이미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로라와 가까운 곳을 지나고 있었다. 마치 불량한 10대 소년 같은 행색-벽에다 그래피티 낙서를 즐기고, 광장에서 지나가는 여자들을 꼬시며 음악을 크게 틀어 놓고 춤을 추는 그런 소년들-을 한 청년이 아까 그 코트의 남자와는 견줄 수 없을 정도의 속력으로 로라를 향해 달려왔다. “꺄악!” 로라는 피하고 싶었지만 아까처럼 돌발 상황에 굳어버린 몸은 남자를 온몸으로 맞이하고 있었다. 그 청년은 로라를 팔로 밀쳐내고 잠시 비틀 하는가 싶더니 속도를 줄이지 않고 방향을 틀어 오른쪽으로 향했다.


  바닥에 쓰러진 로라는 방어하느라 넘어지면서 바닥에 세게 부딪힌 팔에 통증이 오는 것을 느끼며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바구니에 담겨 있던 물건들은 이미 바닥에 널부러진지 오래였다. 팔이 부러지지는 않은 것 같지만 당분간 근육통과 타박상에 시달릴 것을 예감하며 로라는 자리에서 가까스로 상체를 일으켰다. 동시에 그 코트의 남자가 청년이 사라진 쪽으로 코트를 펄럭이며 달려가는 뒷모습 끄트머리를 볼 수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인가 하고 사람들은 고개를 쭉 빼어 소리 나는 쪽을 보았고, 넘어진 로라에게 다가와 괜찮냐고 묻는 친절한 사람들도 있었다. 로라는 웃으며 괜찮다고 말했지만, 속으로는 정말 울고 싶었다. 이쯤 되면 일진이 사나운 정도를 지나쳐 세상이 자신을 미워하고 있다고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기분도 잠시, 멀리서 또다시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고 궁금증을 참지 못한 로라는 아픈 팔을 감싸 쥐고 남자와 청년이 사라진 방향으로 느리게 뛰어갔다.


  마트는 워낙 넓었기에 소리가 난 곳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사방을 가득 메운 물건들 때문에 달아날 길을 찾기가 힘들었는지, 청년은 계산대의 사람들을 밀치고 그 틈새로 빠져나가려 하고 있었다. 그나마도 사람들이 많은 무인 계산대를 택하는 오류를 범하는 바람에 애를 먹고 있었다. 긴 코트의 남자는 전력질주로 그런 청년의 뒤를 쫓으며 외쳤다. “잡아!” 그러자 계산대에 서 있던, 청년의 두 배쯤 되는 덩치의 남자가 마침 자신의 뒤를 파고들던 청년의 옷깃을 붙잡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모르는 건 다들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그 와중에 남자는 정의감에 불탄 모양이었다. 청년은 덩치 좋은 남자의 힘에 끌려 잠시 주춤했지만, 이내 정면 돌파를 감행했다. 그것도 남자의 목에 걸려 있던 머플러를 힘껏 졸라매는 것으로.


  이쯤 되니 사방에 비명이 난무했다. 커헉, 하는 소리와 함께 덩치 큰 남자가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잠시 졸렸을 뿐인데도 남자의 얼굴은 새파랗게 변해 있었다. 방해물을 제거한 청년은 또다시 도망가기 시작했다.


  비상사태임을 감지한 로라는, 아침에 수영장에서 물을 먹고 질식할 뻔했던 아이를 떠올렸다. 그러자 저도 모르게 몸이 계산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마트 직원과, 구경하던 사람들이 쓰러진 남자에게로 몰려들었다. 그가 숨이 찬 듯 헐떡였다.


  청년이 지나간 무인 계산대에 로라보다 조금 빨리 도착한 긴 코트의 남자는, 사람들을 밀치고 서서 잠시 쓰러진 남자를 내려다보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로라와 눈이 마주쳤다. 로라는 깜짝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고 그를 향해 달려갔다. 코트의 남자는 이번엔 손을 들어 아예 로라를 콕 집으며 “당신, 응급처치를 해야겠습니다!” 말했다. 그리고는 쓰러진 남자를 사뿐히 건너뛰어 청년이 사라진 쪽으로 달려갔다. “경찰을 불러요!” 저만치 뛰어가는 코트의 남자의 목소리를 듣고 뒤늦게 당황한 사람들은 저마다 핸드폰을 들고 999 번호를 찍어댔다.


  처음 본(물론 아까 부딪히긴 했지만) 남자가 다짜고짜 자신에게 응급처치를 하라고 말한 것에 로라는 매우 놀랐지만, 일각을 다투는 일이니 마냥 놀라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로라는 구경꾼들을 밀치고 쓰러진 남자에게 다가갔다. 새파란 얼굴은 아까 얼핏 본 그대로였지만 정신을 잃는 대신 남자는 목을 부여잡고 가까스로 호흡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의 목을 조른 검은 머플러는 그 옆에 놓여 있었다.


“도..와..ㅈ....처..ㄴ...시...”


  로라는 남자에게 되물었다. “천식이라구요?” 그러자 남자는 힘겹게 숨을 들이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목이 졸린 거라면 인공호흡이나 재빨리 기도를 확보하는 것으로 나아질 수 있겠지만, 그는 운 나쁘게도 천식 환자였던 모양이었고 그렇다면 호흡에 큰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다. 로라는 옆에서 달려온 마트 직원과 함께 덩치 좋은 남자를 힘껏 일으켜 자신의 무릎 위에 비스듬히 눕게 했다. 그리고는 와이셔츠 단추를 몇 개 더 푸르고 남자가 자켓 안주머니에서 꺼낸 흡입기를 받아들었다. 남자의 목에서는 새액새액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입에 흡입기를 끼우고는 몇 번 방사하니 남자의 호흡이 아까보다 조금 나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천천히 숨을 들이쉬어요.” 로라는 시간을 재며 남자의 호흡이 안정될 때까지 몇 번 더 흡입기를 뿌려주었다. 다행히도 더 악화되지는 않아서 상황이 나빠지지는 않았다. 몇 분 뒤. 경찰들과 구급 요원들이 달려올 때까지 로라는 그렇게 남자의 곁을 지켰다.

 



  넘어지는 바람에 다친 팔이 뒤이어 무리를 하는 바람에 통증이 심해졌다. 그러나 부러지거나 인대가 늘어난 것 같지는 않았기에 간단히 파스를 뿌리는 것으로 응급 처치를 받은 로라는, 붕대를 감아준 응급 요원에게 고맙다고 말하며 마트 안으로 다시 돌아 왔다. 정신없던 현장은 언제 그랬냐는 듯 마트 직원들과 경찰들에 의해 일사불란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경찰들이 지나가며 하는 얘기를 얼핏 듣자하니 아까 도망친 그 청년은 전과가 많은 소매치기라는 것 같았다. 그럼 그 뒤를 쫓던 코트의 남자는 경찰인 건가? 빠른 움직임을 보아하니 경험이 많은 것처럼 보였었다. 로라는 제가 내린 추리에 만족했고 새삼 남자가 굉장하게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로라는 약속 시간이 이미 한참 지나버린 이 시점에 과연 다시 장을 봐 클라라를 찾아가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고민했다. 잔뜩 긴장해있던 몸은 녹초가 된지 오래였고 다 집어 치우고 침대에 몸을 뉘이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그냥 그대로, 아무 성과(?)도 없이 집에 가고 싶지는 않았다. 로라는 이끌리듯 마트로 다시 향했고, 거기서 그 코트를 입은 키 큰 남자를 발견했다. 그녀를 ‘그냥’ 집에 가고 싶지 않게 만든 그 남자를.


  그는 수트를 입은 회색 머리의 남자와 함께 서서 뭔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로라가 다가가자 그녀에게 시선을 주었다. 남자의 푸른 눈이 자신을 보자 로라는 빠르게 상승하는 심장 박동에 온몸의 혈관이 곧 터져버리지 않을까 하는 이상한 생각을 했다. 그러나 피하고 싶지는 않았다. 로라는 자신이 그 남자에게 반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마트를 휘젓고 다니는 걸 본 순간부터. 그리고 자신을 가리켜 응급 처치를 하라고 말했던 때까지. 모든 게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그만큼 강렬했다. 그리고, 오, 가까이서 보니 남자는 너무 너무 핸섬했다!


“다쳤다면서요. 괜찮습니까?”


  남자가 묻자 로라는 붕대가 감긴 팔을 들어 보이며 수줍게 (그녀는 수줍어하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젠장, 왜인지 제이미의 품에 안겨 울었을 때보다 더 부끄러웠다) 웃었다.


“별 거 아니에요. 근데, 아깐 정말 놀랐어요. 왜 저에게 응급 처치를 하라고 말한 거죠?”


  그러자 코트의 남자는 별 거 아니라는 듯 눈썹을 들어 올리며 대답했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 당신이 적임자였으니까요.”


  “적임자라니?” 옆에 서 있던 회색 머리의 남자가 물었다. 로라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비웃듯 남자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고 그건 어째 좀… 거만해 보였지만 로라는 기대하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남자는 로라를 탐색하는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당신, 상체엔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고, 머리카락은 젖어 있죠. 그리고 목에는 호루라기를 걸고 있군요. (이 지적에 로라는 하마터면 헉, 소리를 낼 뻔 했다. 바쁘게 나오느라 호루라기까지 그대로 걸고 나온 줄은 모르고 있었다.) 이 마트 근처에는 대형 실내 수영장이 있고, 당신의 차림새는 그곳에서 막 나온 사람처럼 보였는데 호루라기를 보고 응급 구조 요원이거나, 아니면 수영 강사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응급 처치를 하라고 한 거구요. 내 말이 틀립니까?”


  로라는 입을 벌렸지만 아무 말도 못하다가 뒤이어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정 확해요. 정말 대단하군요. 당신은 누구죠?” 로라의 말에 남자는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셜록 홈즈라고 합니다. 방금 악질적인 소매치기를 잡았죠. 응급처치도 성공적이었다면서요?” 칭찬의 말에 로라는 미소를 머금고 셜록이란 남자의 손을 맞잡았다. “로라 코트너예요. 수영강사죠.”


  그들의 인사가 끝나자 회색 머리의 남자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셜록에게 내밀었다.


“그놈도 참 잘못 노렸지, 하필 자네 핸드폰을 가져가다니.”

“그러니까 잡혔죠. 하필 멍청하게도 제 핸드폰을 소매치기 했으니까요.”


  눈가를 찡그리며 셜록은 핸드폰을 받아들었다. 로라는 그 대화에서, 아까 들은 얘기대로 그 청년이 셜록의 핸드폰을 훔치려다가 잡힌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경찰의 핸드폰을 노리다니. 그 소매치기도 오늘 자신만큼 운이 없었나보다. 그러나 로라는 아까 장바구니를 들고 넘어졌을 때 우울의 최고점을 찍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 그랬냐는 듯, 자신의 운이 그렇게까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운이 나쁘기는 커녕, 눈앞의 이 남자를 만나게 해준 소매치기가 고마울 지경이었다.


  어떻게든 연락처를 따내거나, 인연을 만들어내야 한다. 로라는 전의에 불타올랐다. 전에그녀는 단 한 번도 남자에게 대쉬를 하려는 마음을 먹은 적이 없었다. 그녀는 첫눈에 빠지는 사랑 같은 건 믿지 않는 타입이었다. 수영으로 다져진 몸매라 날씬하긴 했지만, 얼굴에는 그리 자신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갑자기 로라는 감전된 듯 놀랐다. 그러고 보니 지금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추레할지는 생각해보지 않은 것이었다. 거울을 보진 못했지만, 셜록이 지적했듯, 달리느라 잔뜩 흐트러진 젖은 머리에, 트레이닝복과 청바지를 입고 팔에는 붕대를 감아 파스냄새를 폴폴 풍기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목에는 수영 강습 용 호루라기마저 걸고 있었다.


  조금 붉어진 얼굴로 로라는 호루라기를 풀어 주머니에 쑤셔 넣고, 어찌 되었든 일단 도전해보자는 심산으로 셜록에게 말을 걸기로 했다. 수영장에 놀러 오라고 할까? 아니면 명함이라도 달라고 하는 건? 팔을 다쳤으니 경찰이면 분명 연락처를 주거나 받아갈 것이다. 용기를 낸 로라가 셜록에게 입을 연 순간이었다. “저, 괜찮으시다면-” 동시에 셜록의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이 띠리링, 소리를 내며 울렸다. “잠시, 실례.” 셜록은 예의 그 손바닥을 들어 올려보이고는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는 잠시 이마를 찌푸렸다.


“… 다짜고짜 소리를 지르면 쓰나. 나도 마트라고. 그래. 어딘데? 2층? 난 1층인데. 그래. 그럴 일이 있었어. 받고 싶어도 전화를 받을 수가 없었다고. 그래, 어떤 멍청한 놈 때문에 달리느라!! 2층에서 1층 소식 못 들었나?”


  셜록이 전화를 받는 기세에 눌린 로라의 얼굴에 미소가 조금씩 사라져갔다. 반면 옆에 서 있던 회색 머리의 남자의 얼굴에는 미소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는 셜록이 전화를 받는 상황을 즐거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알았으니까 1층에서 보지. 그래. 컵 두 개 가져오는 거 잊지 말고.”


  컵? 로라는 전화의 마무리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것까지 물어보는 건 실례일 것 같아 호기심을 눌렀다. 전화를 한 사람은 친구인가? 말투를 보아하니 그런 것 같았다. 전화를 끊은 셜록은 로라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무슨 얘길 하려고 했죠?” 그러자 로라는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셜록의 가슴께에 두었다. “아아, 괜찮으시다면, 한가할 때 저희 수영장에 한번 놀러 오시라는 말이었어요. 시설도 좋고, 물도 깨끗해요. 아, 뭐, 음. 바쁘실…것 같지만. 하하하.” 로라는 제가 생각해도 제말이 참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더듬거리는 말을 웃음으로 끝맺고 슬그머니 시선을 들어 셜록의 표정을 보았다. 그런데, 그의 표정이 조금 미묘했다. 웃는 것도 찌푸리는 것도 아닌 그런 느낌?


“고맙지만, 사양하죠.”


  그리고 돌아온 셜록의 말에 로라는 수영장에서 점프하다가 바닥에 머리를 들이받은(그럴 일은 드물지만)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거절당한 건가? 난 지금 제대로 거절당한 거야? 역시 이 추레한 행색이 문제였어어어? 혼란스러워하는 로라의 마음을 눈치 챘는지 회색 머리의 남자가 덧붙였다.


“아, 이 친구는, 수영장에 대한 안 좋은 추억이 있거든요. 보통 사람이라면 온 세계의 모든 수영장을 다 싫어하게 될 만한 그런 일이…말이죠. 하하. 으흠.”


  셜록이 남자를 째리듯 노려보자 남자는 헛기침을 했다. 그러나 셜록은 그의 말에 별다른 부정은 하지 않았다. 로라는 그제야 셜록이 자신이 싫어서 자신의 권유를 사양한 게 아니라는 걸 이해할 수 있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그는 정말 수영장을 싫어하는 것이다. 온 세계의 수영장을 다 싫어할 수 있을 만큼.


  물에 빠진 적이 있나? 아니면 수영하다가 수영복을 잃어버렸다던가? (흔하진 않지만 남녀 불문하고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대체 수영장을 그렇게까지 싫어지게 할 만한 사건이 뭐란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지만, 그 말이 의미하는 것만은 확실했다. 로라는 좌절했다. 수영장이 싫다면, 저 남자를 꼬시는데 뭘 빌미로 삼지?


  그런 생각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로라는 문득 등 뒤에서 털털거리는 카트 소리를 들었다. 셜록도 마찬가지로 그녀의 뒤편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 카트 소리는 매우 느릿했지만, 다른 카트들보다 좀 더 시끄러웠고 일정했다. 마치 일부러 그런 소리를 내는 것처럼 들렸다.


  뒤를 돌자, 로라는 베이지색 스웨터 차림에 털 달린 회색 점퍼를 입은 한 남자가 카트에 두 팔을 지그시 얹고 전투적인 표정으로 자신들을 향해 카트를 밀고 오는 것을 보았다. 남자는 키도 작고 귀엽게 생겼지만 곧 자신들을 카트로 밀어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짜증과 분노를 가득 담고 있는 얼굴이었기에 로라는 잔뜩 긴장했다. 혹시 아까 그 소매치기처럼 이상한 남자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 의혹은 셜록이 남자에게 한 발 다가가 카트 안을 들여다보는 행동을 함으로서 풀리게 되었다.


“컵은 두 개만 가져오라고 했잖나. 존.”

“오늘 아침과 같은 일이 또 벌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카트에 담긴 빨갛고 노란 컵 세트 네 개를 들여다보던 셜록은 남자의 말이 마음에 안 드는지 눈살을 찌푸렸다.


“흥, 현미경을 옮기다가 싱크대로 떨어트려서 컵을 깬 건 자네지 내가 아니야. 원망할 생각 말게.”

“그래. 그리고 식탁은 식사를 하는 장소지 연구를 하는 장소가 아니라는 걸 좀 알아줬으면 좋겠군. 제발 내가 그것들을 옮기다가 컵을 깨지 않도록 말이야.”

“자네는 확률을 무시하는군. 다음번에 또 컵을 깰 거라고 확신하고 있는 모양인데, 틀렸어. 컵 대신 접시가 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안 깰 거라고는 죽어도 말 안하지.”


  옆에서 그들의 말을 들은 로라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건 무슨 대화지? 그러나 셜록은 아무렇지 않게 그 남자와 대화를 이어나갔다.


“존, 오늘 점심은 뭔가?” 여기서 그 존이라는 남자는 회색 머리의 남자에게 인사했다. “오랜만이군요.” 그도 존을 아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셜록의 말에 입을 삐죽였다. “점심을 내가 만들어야 하는 거야? 난 외식하려고 했는데.”

“그럼 장은 왜 보자고 한 거야? 그냥 밖에서 사 먹으면 되지.”

“자네가 부엌에 있던 우유랑 식빵을 다 먹어버린 건 기억 안 나고?”

“그건 그냥 아무 때나 자네가 사오면 되잖아. 고작 그것 때문에 장을 보려고 날 부른 건가? 덕분에 마트 입구에서 소매치기에게 당하고 그놈을 잡느라 난 몇 백 미터를 달려야 했다고-”

“소매치기?”


  눈을 동그랗게 뜨는 존에게 셜록이 아까 있었던 일을 설명하는 동안, 로라는 코웃음을 쳤다. 아아, 이런 거였어. 역시 그렇지. 오랜만에 좀 멋진 남자를 만나나 했더니. 수영장에 놀러 오래도 싫다고 하고. 게다가 점심은 저…남자랑 외식하겠다니.


  로라는 방금 전 그리 운이 나쁘지 않은 것 같다는 자신의 생각을 정정했다. 삼십년을 살아오면서 이런 날은 처음이라고 느낄 정도로, 사상 최고로 더럽게 운 없는 날이었다. 아침부터 구르고 울고 다치고 하긴 했지만, 처음으로 가슴 설레게 하는 남자를 만나는 건가하고 잔뜩 기대했는데. 하필 반한 그 남자가, 그 남자가.


  게이라니.


“허, 참. 하마터면 연락도 못 하고 나 혼자 장 볼 뻔했군.”

“그 소매치기 녀석이 운이 없었던 거지. 그럼 오랜만에 차이니즈 레스토랑에 갈까?”

“장 본 물건들은 어떡하고?”

“뭐, 레스트레이드에게 부탁하지. 경감?”


  셜록은 몸을 돌려 회색머리의 남자를 보았고 경감이라 불렸지만 졸지에 배달 셔틀이 된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로라를 보았다.


“혹시 다친 팔에 문제가 생기거나 하면 여기로 전화 주시면 될 겁니다.”


  그가 내민 명함에는 번쩍번쩍한 글씨로 이렇게 써있었다. 스코틀랜드 야드 경시청 CID 소속 경감 그레고리 레스트레이드. 로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원한 건 저 셜록이란 남자의 연락처이지 레스트레이드란 남자의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제는 셜록에게 연락처를 받아봐야 소용도 없었고.


  레스트레이드는 로라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두 남자에게 향했고 그들은 카트와 함께 반대 방향으로 사라졌다.


“아, 셜록. 점심만 먹고 난 다시 병원에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은데. 갑자기 일이 생겨서.”

“그래? 자네 오늘 늦게 들어오나?…”


  멀어지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로라는 레스트레이드가 주고 간 명함을 힘껏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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