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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 2011. 5. 23. 01:00

셜존 :: 熱




명탐정이 앓아누웠다. 아무리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자문 탐정이래도,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신경쓰지 않는다. 혹독하게 몰아세운다. 간밤에 열이 39도까지 치솟았다. 때마침 주말이었기에, 어쩔수 없이 차가운 습포제와 이부프로펜 만으로 이겨낸 새벽은 실랑이의 연속이었다. (물론 주말이 아니었다 해도 그가 병원에 갔을지는 미지수다.) 편안한 침대를 놔 두고 기어코 거실로 기어나오는 기이한 행동. 따듯한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은 싫다고 어린아이처럼 칭얼댄다. 그나마 다행인 건 열이 치솟는데도 불구하고 오한이 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불은 필요 없었다. 파란 파자마 차림으로 소파에 누웠다. 덕분에 좀 더 편안하게 부엌에서 거실의 긴 소파로 차가운 수건을 날랐지만, 조금이라도 몸이 긴장을 푸는 편이 좋을텐데 그러지 않는 그의 미련함에 혀를 찼다. 내가 본 그의 마지막 모습은, 사건을 해결에 몰입할 때 자주 보여주던 두 손을 모은 그 자세 그대로였다.


아무리 강인한 체력이라고 해도, 근 일주일동안 먹은 게 버적거리는 빵과 우유가 전부라면 누구든 영양실조로 병이 날 것이다. 나는 그가 이번 일을 계기로, 자신의 생활 습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기를 바랐다. 일에 몰입할 때는 밤과 낮의 구분도 없이, 오로지 사고의 흐름속에서만 사는 버릇. 먹지도 않고, 찬바람 몰아치는 바깥을 코트와 머플러로 동여맨 채 뛰어다닌다. 병자에겐 관심과 보살핌만이 필요할진대, 답답해져 결국 잔소리를 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열에 시달리면서도 그 빌어먹을 정신만은 여전해서, 비웃듯 입꼬리를 슬며시 올렸다.



   생각이 흘러갈 땐 그대로 놔 두어야 해. 컴퓨터로 예를 들면 간단하지. 연산을 처리할 때 도중에 강제 종료해 버리면 오류를 일으키지 않겠나. 마찬가지야.


   하지만 컴퓨터든 사람이든 과열되면 터져버리잖아. 그러다간 결국 포맷해버려야 한다고.



말했더니 입을 꾹 다문 명탐정은 답이 없었다. 얄미워서 이마의 습포제를 자비없이 뜯어내고 새 습포제로 갈아주었다. 찌푸린 미간에 주름이 진다.


덕분에 거실에서 맞이하는 고요한 일요일 아침이다.


잠시 눈을 붙였다 일어나니 열이 들떠있던 그의 호흡이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깨지 않도록 이마에 손등을 가만히 대니, 열을 먹어 미지근해진 습포제가 만져진다. 구급약통을 열어보니 습포제가 들어있던 상자는 텅 빈 속을 내보였다. 하는 수 없이 그의 목을 덮어 주었던 수건을 조심스레 들어내어 부엌으로 향했다. 차가운 물 속에 담근 손이 시린다. 간밤에 만졌던 그의 몸의 열기와는 전혀 다른 감각이다. 잠이 든 건지 깬 건지 모를 그는 아무 말 없이 조용했다.


한 손에는 수건을, 한 손에는 체온계를 들고, 그가 누워있는 소파의 앞에 섰다. 여전히 그는 눈을 감고 있었다. 쉽사리 잠에 들지 않아 수도 없이 뒤척였던 것이 거짓말 같다. 습포제를 뜯어내려던 손이 멈춘다. 어렵게 취하게 된 휴식이라 마음이 약해졌다. 밤새 열에 시달리다 이제야 편히 잠든 그를 깨워버리게 될 것이다. 나는 손을 거두고,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았다. 마치 그러면 그가 저절로 눈을 뜨기라도 할 것처럼.


그저 눈이 마주칠 것을 기다렸다.


짙은 눈썹과 구불거리는 검은 머리카락 사이에 붙은 파란 습포제가 우스웠다. 지금 이 광경을 본다면 야드의 특정 누군가들은 놀라워 할지도 모른다. 괴물도 아플 때가 있나? 비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러나 내 손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뺨과, 목덜미에 또아리를 틀 듯 자리하던 지나친 열기를. 침입자와 싸우는 뜨거운 혈액들을. 날카로운 콧등과 굳게 다문 입술은 그 무엇에도 쉽게 내주지 않을 것처럼 고집을 부렸지만 병마에는 무용지물이었다. 긴 목덜미와, 풀어헤친 파자마, 차가운 수건이 얹어졌던 티셔츠에 남은 물기.


사람들은 그를 냉혈한이라 불렀지만 나는 그의 몸이 지나치게 차갑지도, 지나치게 뜨겁지도 않다는 것을 안다. 온기를 재던 입술과, 맞닿은 이마에서 느껴지는 포근함으로.



   자네 거기 계속 서있을 텐가.



어느새 잠에서 깬 그가 말했다. 기척에 민감한 명탐정다웠다. 혹은 한참 전부터 깨어 있었는지도. 다행히도 눈을 들어 마주치거나 하지 않았다. 맞닿은 시선은 변명을 할 수 없으니까. 헛기침을 했다. 자네가 잠에서 깨길 기다렸어. 다만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을 것이다. 시시때때로 마주하는 불순한 시선과, 일부러 외면하는 가장 속에서 붉어지는 귓가를. 그것들의 의미를.



   아직도 지나치게 뜨겁군.



그는 불평하듯 중얼거렸다. 벽난로는 이미 꺼진 지 오래고, 거실은 한겨울이 내뿜는 차가운 입김으로 가득차 있다. 수건을 든 손은 동상에 걸릴 것처럼 얼어붙었다. 입김이 날 지경이었다. 나는 오소소 몸을 떨었다. 무엇이 그리 뜨겁다는 건지.


미지근해진 습포제를 떼어내고 가져온 수건을 이마에 얹었다. 미간의 주름과, 감은 눈이 그 속에 온전히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안도했다. 잠시 스친 이마는 여전히 열기를 머금고 있었다. 열을 재야 했다. 온도계가 손 안에서 삐익 소리를 냈다.



   체온을 잴 테니 잠깐 입을 벌려 봐.



군말 없이 입을 벌린다. 굳게 다문 한 일자의 입술이 부드럽게 열렸다. 마른 입술이 힘겨워 보였다. 그 속에 담겨있는 붉은 혀.


열기 때문일까, 아니면 지나치게 낮은 방 안의 온도 때문일까. 그것은 녹다 만 붉은 사탕처럼 달콤할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온도계를 넣으려다 말고, 나는 잠시 그의 입 안에 손가락을 넣는 상상을 했다. 차가운 손가락은, 열을 빨아들여 금세 뜨거워질 것이다. 붉은 혀는 꿈틀거리며 얼음이라도 녹이는 것처럼 손가락에 엉겨 붙겠지.


그에게 나의 낮아진 체온을 전해주고 싶었다.


마치 나의 마음을 읽은 듯, 천천히 그가 입을 다물었다.



   자네는 너무 환자를 거칠게 다루는군.



나는 폭소하고 말았다.



   친절하고 상냥한 간호사를 원하는 거라면 내일 당장 불러다 주지.



그러자 그가 가만히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손에 체온계를 쥐어 주었다. 맞닿은 두 손이 극과 극의 온도를 가지고 스며든다. 그의 입이 벌어졌고, 나는 그 속에 든 달콤한 사탕을 취하기 위해 허리를 굽혔다. 메마른 입술을 적시며 혀를 굴리니 순순히 녹아든다. 차가울 것만 같았던 나의 혀와, 뜨거울 것 같았던 그의 혀.


손바닥에 닿은 그의 뺨은 여전히 뜨거웠다. 입술을 떼자 탐정은 중얼거렸다.



   아냐, 됐어. 이걸로 충분해.






 존 너 이자식... 하라는 간호는 안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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