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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 2011. 6. 6. 09:00

셜존 :: 베이커가의 CCTV 그 이전



  알코올은 과연 사람을 어느 정도까지 미치게 만들 수 있는가.

  라는 흥미로운 논문 주제가 떠올랐다. 문제는 연구를 위해서 술 마시고 미치는 사람들을 여럿 만나야 한다는 건데, 생각하니 그냥 그 연구는 고이 접어두기로 했다. 연구 대상은 문 밖에 있는 저 남자 하나로도 족하다. 부디 이 연구 과제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연구 대상이었으면 좋겠다. 새벽 2시에 격하게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잔뜩 짜증이 난 얼굴로 현관문을 연 셜록은 문 앞에 거의 대롱대롱 매달리다시피 한 상태로 서있는 존 왓슨을 보고 다시 문을 닫았다. 차가운 밤바람 사이로 훅, 술 냄새가 풍겨왔다. 짜증도 같이 밀려왔다.


  얼마 못 가, 문이 부서져라 두드리는 전직 군인의 술주정은 어떻게 말려야 하나, 라는 두 번째 연구에 돌입한 셜록은 부지런히 하드 디스크를 돌려보았지만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라는 답만 내놓는 머리를 탓하며 다시 문을 열었다. 일단 허드슨 부인이 깨기 전에 플랫으로 올려보내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았다. 벌컥 열리는 문 때문에 휘청이던 존은 손에 들고 있던 흰 봉지를 다짜고짜 셜록에게 들이밀었다.


“우유! 우! 유! 사왔다고오오오! 문 열엇!”


  별로 안 고마웠다. 그 와중에 우유 사올 정신이 있다니 신기했다. 그래. 두 시간 전에 셜록은 존에게 문자를 보냈었다. [우유가 다 떨어졌어. - SH] 그러자 답변이 돌아왔다. [작작 좀 마시라고!] 평소와는 달랐다. 어쩐지 과격하다 했다. 바츠의 친구들을 만나러 간다고 했을 때부터 이렇게 고주망태가 될 것을 예상했어야 했는데.


  셜록은 존의 손에서 우유를 빼앗아 들고 한쪽 팔을 자신의 어깨를 휘감게...하려 했으나 뭔가 상당히 위아래가 짧은 덕에 그냥 허리를 감는 걸로 만족했다. 존의 손이 셜록의 파자마를 꼬옥 쥐고 잡아당긴다. 존의 허리를 힘겹게 부축하고 계단을 한 발 한 발 딛었다. 그 순간 조차 어찌나 몸부림이 심한지, 셜록은 이대로 존의 배에 한 방 먹이고 잠잠해지면 들쳐업어 플랫 바닥으로 옮겨놓을까 고민했다. 그러나 의식을 잃은 사람은 무겁다. 들지 못할 게 분명했다. 그냥 그대로 방치해서 허드슨 부인이 계단에 시체처럼 널려진 존 왓슨을 보고 아침부터 비명을 지르게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생각하는 동안 어찌저찌 두 사람은 거실에 도달했다. 문을 닫자마자 셜록은 존을 긴 소파에 내동댕이 쳤다.


“바츠의 친구들을 만나게 하는 건 앞으로 고려해봐야 겠군요.”


  말해 놓고 조금 후회했다. 남편이 불륜이라도 저지를까 전전긍긍하는 아내의 대사처럼 들렸다. 존이 술에 취해 있기에 망정이지, 맨 정신일 때 저런 말을 했다면 평생 웃음거리가 될 뻔했다. 다행히 정신 나간 존은 이해하지 못했는지 소파 위에서 잠시 몸부림을 쳤다. 데굴데굴 좌우로 구르더니 으히히히 웃는다. 조금 무서웠다. 셜록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갑자기 존이 벌떡 일어나 앉아 셜록에게 외쳤다.


“우유 사왔다고!”

“알았어요. 잘 했어요. 굿 잡.”


  혀를 쯧쯧 차며 셜록은 들고 있던 우유를 봉지째 냉장고에 넣었다. 부엌에 다녀오는 동안 존은 앉은 채 꾸벅 꾸벅 졸고 있었다. 흡사 따뜻한 햇볕 아래서 조는 강아지 같았다. 단지 좀.. 광견병에 걸린 강아지랄까. 셜록은 (역시 가까이 다가가지 않은 채) 존에게 말했다.


“존, 대답해 봐요. 존.”


  셜록은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조금 더. 그리고 조금 더. 어깨를 잡아 흔드니 존이 눈을 번쩍 뜨고 셜록의 손목을 붙든다. 손아귀 힘이 억셌다.


“왜 맨날...”


  셜록은 다시 물러나려고 했다. 그러나 존의 힘이 워낙에 센 탓에 쉽지 않았다. 셜록은 발버둥에 가까운 모습으로 손을 흔들었다. 놓지 않는다. 그래. 전직 군인이었지. 그리고 의사. 귀여운 모습 덕에 종종 잊곤 하지만 전적이 꽤 많은 남자였다. 해리엇의 증언에 따르면 - 물론 셜록에게 증언한 건 아니다... 모종의 뒷조사? - 술만 마시면 바에 있는 괜찮은 여자들 중 한 둘을 꼭 꼬시는 데 성공하는 능력도 가진 남자수컷이었다. 그런 남자가 불만이 가득 담겼지만 혀가 꼬여서 역시나 귀엽게 들리는 발음으로 셜록에게 말했다.


“왜 매앤날 마트는 내가 가는 건데! 셜록! 필요한 게 이쓰면 네가 직접 사라고오!”


  반쯤 뜬 눈이 셜록을 본다. 웃으려던 건 아니었는데 셜록은 그의 모습이 너무 웃겨서 피식거리고 말았다.


“존, 카드가 당신에게 있잖아요. 내 카드.”

“아...그런가?”


  기세는 다 어디가고 잠잠해진 존은 셜록의 손을 놓고 (때를 틈타 셜록은 두 걸음 물러났다.)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자켓 안 주머니, 겉 주머니, 그리고는 바지 주머니. 바지 주머니에서는 핸드폰을 꺼내더니, 마지막에 바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발견하고 분해하듯 내용물을 하나 둘 꺼냈다. 몇 초 뒤엔 셜록의 카드를 꺼내는 데에도 성공했다. 그리곤 힘껏 팔을 뻗어 셜록에게 내민다. 그 카드가 셜록의 카드인 걸 알아본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셜록은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지 않으려 애쓰며 존의 손에 들려 있던 카드를 낚아챘다.


“자, 이젠 마트에 직접 가... 필요 없어. 우유따위...”


  의미 불명의 말들을 중얼거리더니 이번엔 자리에서 일어난다. 지갑이 바닥에 굴러 떨어졌다. 안에 들어있던 영수증들과 5파운드짜리 지폐와 10파운드 짜리 지폐 몇 장도 함께. 와중에도 핸드폰은 손에 꼭 쥐고 있었다. 자켓을 벗으려던 존은 손에 든 핸드폰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게 뭐지? 아. 내 핸드폰...”


  셜록은 하드디스크에 관찰한 바를 저장했다. 술에 과하게 취하면 평소 지니고 있던 익숙한 물건들도 낯설어지게 됨. 그리곤 한숨을 내쉬었다. 저러다 총이라도 쥐어 주면 기겁하겠군. 존은 꿈틀거리며 자켓을 벗어 바닥에 내팽개치더니 손에 들고 있는 핸드폰을 다시 물끄러미 보았다.


“아, 내 핸드폰이로군...”


  잊어버리는 건가!! 흡사 공포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 타겟은 역시나 또 셜록이었다. 존은 신경질을 내며 셜록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그렇게 문자르을.. 보내고 시프면 내 핸드폰을 써! 아예 갖고 다니라고! 괜히 먼데 있는 사람 불러서 오라 가라 하지 말고...오!”

“존, 지금은 필요 없어요. 그리고 그건 당신 핸드폰이잖아요.”


  그러자 존은 소파에 핸드폰을 내동댕이쳤다. 존의 행동처럼 셜록은 존을 소파에 내동댕이 치고 싶었다.


“나도 필요 없어.”


  그러더니 뭔가를 찾는 듯 두리번거린다. 세상이 뱅글뱅글 도는지 잠시 고개가 왔다 갔다 했다. 저러다 쓰러지겠어. 하지만 셜록은 차라리 쓰러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이 세상에 평화가 찾아올 것만 같은데. 어째서 집에는 마취제가 없는 거지?

  존은 책 더미가 가득한 책상으로 힘겹게 다가가 그 틈에서 나란히 놓여 있는 노트북을 집어 들었다. 존의 것이었다.


“블로그으 써야 해....”


  가관이었다. 무의식의 발현은 꿈에서만 하는 게 아니었다. 파워 블로거라도 되려는 건가? 셜록은 헛웃음을 지었다. 게다가 주정뱅이의 악력이란 믿을 게 못 되는 법. 하마터면 손에서 미끄러져 낙하할 뻔한 존의 노트북을 셜록이 타이밍 좋게 잡아냈다. 가만히 뒀다간 노트북도 두 동강 낼 판이다. 그래봐야 제 것도 아니니 상관없었지만 존이 없을 때 가끔 거실에서 가져다 쓰곤 했으니 없으면 불편할 거였다. 셜록의 품에 안은 노트북을 잡기 위해 존이 두 팔을 허우적거렸다.


“내 놔! 내 컴퓨터라고!”

“알았으니 진정해요, 존. 지금 무슨 블로그를 쓰겠다고..”

“넌 니 거 써! 셜록, 그 잘난 니 하드 디스크를 쓰란 말이야!”


  아... 그건 매일매일 쓰고 있습니다만. 셜록은 존을 밀어냈고 격렬히 반항하던 그는 온몸을 다해 셜록에게 부딪혔다. 아프가니스탄 전투도 이렇게 긴박감이 넘치지는 않을 것이다. 셜록의 푸른 파자마가 힘차게 펄럭였다. 발버둥 치던 존은 셜록을 매트리스로 삼아 거실 바닥에 장렬히 쓰러졌다. 하마터면 노트북을 두 동강 낼 뻔한 셜록은 팔꿈치와 명치에 저릿하게 올라오는 통증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아슬아슬하게 세이프였다. 팔 하나를 희생한 덕분에 노트북은 무사했다.


  젠장. 그냥 부숴버리는 건데. 바닥에 누운 셜록은 천장이 빙글빙글 도는 것을 느꼈다. 술도 안 마셨는데 술을 마신 것 같은 효과다. 정작 술에 전 당사자는 셜록의 품에 곱게 안겨 미동도 하지 않았다. 노트북을 밀어놓고 셜록은 고개를 들어 존을 보았다. 설마 죽은 건가?


“존.”


  어깨를 흔드니 존이 큰 한숨을 쉬었다. 그냥 잠든 거로군. 정말 고약한 술주정이 아닐 수 없다. 하드 디스크를 손상시킬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셜록은 술 마시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마이크로프트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애초에 이렇게 취하고 싶은 일이 별로 없다는 게 맞을 것이다. 세상은 언제나 셜록을 위해 돌아갔으니. 레스토랑에서 마시는 가벼운 와인 한 잔 정도면 모를까. 스트레스 때문에 술이 생각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역시 군인은 군인다웠다. 술주정마저 전투적이었다. 술도 폭격 내리듯이 마셔댔는지도 모르겠다. 내일 일어나면 앞으로 금주령을 내려야겠다고 셜록은 다짐했다. 그 다짐이 마치 남편 술주정에 속 썩는 아내의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애써 떨쳐냈다. 요새 TV를 너무 많이 본 모양이다.


  셜록은 존을 일으켜서 침실로 올려 보낼까 아니면 소파에 처박아둘까 잠시 고민했지만 둘 다 불가능해 보인다는 연산 결과가 나왔다. 어쩔 수 없이 존을 끌어당겼다. 배 위에 느껴지는 존의 얼굴 움직임이 간지러웠다. 잠투정이라도 하는지 존은 마치 베개를 끌어안는 것처럼 셜록을 꽈악 끌어안기 시작했다. 으스러질 것 같았다. 셜록은 속으로 외쳤다. 베개 안 뺏는다고! 제발 일어나라고! 이상했다. 이것도 술의 힘인가. 평소의 존은 침대에서 잠버릇이 고약한 편은 아니었는데.


“으응..”

“존, 일어나 봐요.”


  셜록은 그를 떼어내기 위해 애쓰다가 결국 옆으로 구르기를 택했다. 자세가 바뀌어 존이 벌러덩 눕고 셜록이 그 위에 올라탔다. 의외로 간단히 존을 떼어내는데 성공한 셜록은 자리에서 일어나 존의 구두를 벗기기 시작했다. 그 다음엔 존의 위에 올라타 니트를 벗겨냈다. 몸부림치는 바람에 오래 걸렸지만 어쨌든 해 냈다. 그 다음은 넥타이를 풀었고, 마지막은 바지의 벨트였다. 낑낑거리며 벨트를 빼 내는데 성공한 셜록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답지 않은 친절을 베푸는 것이 아니었다. 내일 아침에 거실 바닥에 널부러진 스스로의 모습을 깨달으면 엄청난 수치심이 찾아오리라. 그걸 기대했다.

  그러나 언제 일어났는지 덥석 파자마를 끌어당기는 존의 힘에 이끌려 셜록은 그 위에 철썩, 나동그라지듯 엎드리고 말았다. 셜록이 이를 악물었다.


“존!”

“지금 하자느은 건가아, 셜록?”


  그리고는 셜록의 목을 휘감는다. 버티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셜록은 존의 손에 옴짝달싹 못하고 한동안 술 냄새 폴폴 나는 키스를 해야만 했다.

 



  술 취한 사람은 그냥 모른 척 하는 게 가장 좋음. 연구의 결론이 셜록의 하드디스크에 새겨졌다. 너무 늦은 것 같지만 어쨌든.




그래서 두 사람은 그 뭔가를 하고(..) 셜로긴 와중에 CCTV도 발견하고... 다음날 자신의 침실 침대에서 일어난 존이 내 옷! 하면서 거실로 내려갔다가 핸드폰은 소파위에 처박혀 있고 지갑은 털려있고(..) 노트북은 바닥에 굴러다니는 걸 보고 도둑이 들었다며 호들갑을 떨..뻔 했지만 셜록의 썩소를 보며 지난 밤을 곰곰히 되새겨본다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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