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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 2011. 1. 5. 00:00

셜록 :: 너는 내 운명

레스트레이드에게 사건 기록을 넘겨주고 베이커가로 돌아온 셜록은, 병원에 있어야 할 시간에 웬일로 존이 집 소파에 널부러져 있는 것을 보았다. 아침부터 컨디션이 좋지 않다면서 하얗게 질린 얼굴로 병원에 출근하더니, 결국 조퇴를 한 모양이었다. 그럼 침실에 들어가서 쉴 것이지 굳이 싸늘한 거실에 불편하게 누워 있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생각한 셜록은 불씨가 꺼져가는 벽난로에 나무를 몇 개 더 집어넣고 그의 앞에 섰다.


  “존, 일어나.”


  힘없이 눈을 뜬다. 그 모양이 꼭 병든 아기고양이 같다는 생각을 하며 셜록은 그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아.. 셜록......”

  “자려면 침실로 올라가는 게 좋을 텐데. 보아하니 감기에 걸렸나 보군?”

  “응. 그런 것 같네.”


  열이 올라 발개진 얼굴을 비비던 존은 움직일 힘도 없는지 다시 물먹은 빨래처럼 축 늘어졌다. 아무래도 어제 새벽에 범인의 흔적을 잡으러 이리저리 쏘다닌 게 원인인 것 같았다. 행여 옮기라도 할까 셜록은 멀찌감치 그에게서 떨어져 책상 앞에 앉았다. 그리고는 블로그에 사건 기록을 쓰기 위해 컴퓨터를 켰다. 머릿속의 하드 드라이브를 들쑤시며 글을 작성하는 동안 셜록은 널부러진 존에 대해 깡그리 잊었다. 십여 분 만에 블로그에 올릴 사건일지의 작성을 끝내고 존의 블로그를 우연찮게 클릭한 셜록은 가장 최근에 갱신된 글에 SH 라는 글자를 보았다. 그는 별로 놀라지도 않고 망설임 없이 그것을 클릭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더불어 사는 삶이란 무엇일까? (Dear, SH)

 

  사생활을 블로그에 노출시키는 것만큼 치부를 드러내는 것도 없겠지만, 굳이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이 블로그의 독자들이 나와 내 룸메이트에 대해 올바른 평가를 내려주길 바람에서이다. 문득 이 생활에 회의가 들었지만 확신할 수 없는 나는 마땅히 털어 놓을 곳도 없어 소심하게도 블로그라는 공간에 내가 생각하는 우리 생활의 문제점을 적어 본다.

  아무리 오랜 기간 군대에서 지내며 단체생활에 익숙해졌다 해도, 서로가 규율과 절도로 거리감을 지켜온 생활과 생판 모르는 타인 둘이서 공간을 나눠 쓰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제대한 후 일을 구하지 못한 난 더 이상 호텔에 돈을 쓰며 지낼 수 없는 상태가 되었고 그래서 시급히 룸메이트를 구하게 되었지만 만약 그와 내가 맞지 않는 생활방식을 가졌다면 우리는 길게 가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가 만난 첫 날 새로운 집을 보러가기로 하고 둘째 날에 사건에 휩쓸린 것은 기묘한 우연이 빚어낸 일종의 테스트가 아니었나 한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우리는 마치 오래 전부터 함께 살아온 것처럼 자연스럽게 서로의 생활에 일부가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의 사고방식이나 생활 패턴에 백프로 찬성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몸을 말끔히 하는 일과 사건에 관련된 지식, 바이올린 연주와 그가 좋아하는 몇몇 음악가들을 제외하면 다른 것들엔 철저히 관심이 없었다. 특히 내가 불만을 가지는 것은 함께 사용하는 공간이면서 자신이 어지른 것들에 대해 청소나 정리정돈은 전혀 하지 않거니와 부엌은 그의 실험실이 된지 오래고 요리는 할 줄도 모르며 때문에 떨어지는 비품이나 식료품에 대한 관리는 오로지 내가 해야 한다는 점이다. 또한, 그 바이올린 연주는 어떤가! 그가 아마추어이지만 매우 능숙한 바이올리니스트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다만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바이올린을 키는 것에 대한 일방적인 통보만 했을 뿐, 변덕스런 연주에 대한 자제를 요구했을 때 그는 거기 내가 없는 것처럼 굴었다. 내게 남은 건 불면의 밤들로 인한 잦은 지각과 업무 중 숙면으로 인한 손님들의 불만뿐이었다!

  이런 일련의 행동들에 대해 처음에는 노골적으로 그에게 불만을 표시했지만 그는 전혀 자신의 생활을 공동생활로 바꾸려는 노력을 보이지 않았다. 즉, 그는 이 베이커가 221B에 혼자 살고 있으며 나는 그의 삶을 도와주는 보조적인 존재라는 식이다. 만약 방세를 나누어 낼 수 있고 요리와 가사 일을 할 줄 알며 그의 연구를 방해하지만 않는다면 그는 남녀노소, 혹은 짐승이나 로봇을 막론하고 흔쾌히 동거를 승낙했으리라. 때문에 나는 잠자코 그의 행동들을 묵인하다가 스트레스가 쌓일 대로 쌓이면 폭발해버리는 악순환을 겪고 있다. (함께 사는 사람도 이러할진대 그가 결혼을 하게 되면 그 부인의 스트레스는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누가 될지는 몰라도 미리 심심한 위로를 표하며 잠시 묵념.)

  너무 소리를 지르는 것도 좋지 않다는 생각에, 화를 내지 않으며 차분히 이야기해보고자 이런 나의 불만들에 대해 지난 밤 저녁 식사를 하며 - 물론 그는 맡고 있는 사건 때문에 식사를 하지 않았다. - 넌지시 말해보았더니 코웃음만 흥, 치며 대꾸할 가치가 없다는 듯 자기만의 생각에 빠져버렸다. 하마터면 접시가 깨질 뻔 했지만 (왜 갑자기 접시가 깨질 뻔 했는지는 생략하기로 하겠다.) 나는 꾹 참고 설거지를 하며 분풀이로 그의 실험용 플라스크들을 두어 개 깨뜨렸다. 사건 때문에 바쁠 테니 설마 이 글을 보진 않겠지만 혹시 본다 해도 상관없다. 극히 졸렬한 치사라고 비난해도 그는 내 이 모든 견해에 반박할 수는 없을 테니.

  임시직을 구하지 못하고 세금 고지서들만 나의 존재 가치에 의의를 두며 날아와 나를 괴롭혔던 오래전, 그의 카드가 그와 나의 (특히 나의) 생활을 구제한 것만은 사실이지만, 그에 대한 노동의 대가는 충분히 지불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은 나도 일을 하고 있고 이 집에 대해 그의 룸메이트로서의 동등한 권한이 있는데 어째서 우리의 이런 생활 패턴만은 바뀌지 않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이러다 내가 과로로 쓰러지기라도 하면 그는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있기나 할까?

  긴 글이 끝나간다. 서두에 쓴 것처럼 독자들의 생각을 듣고 싶다. 내가 정말 이 생활을 견디어 내야 하는 것인가?

  레스트레이드 경감을 만나러 갔던 그가 방금 돌아왔다. 나의 도움이 필요하다며 당장 함께 나가자고 한다. 난 오늘, 그가 내 말을 무시하는 한이 있어도 꿋꿋하게 집주인 허드슨 부인이 누누이 강조하는 그 말을 전하려 한다.

  친애하는 SH, I'm not your housekeeper. 이번엔 네가 우유 좀 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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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arry Watson

  감히 내 동생을 가정부 취급하다니!


  Mike Stamford

  이 글을 보니 내가 대신 사과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군. 정말 미안하네. 그가 그 정도일 줄은 몰랐어.


    Harry Watson

  당장 이사해! 새 집을 구할 때까지 내 집에 잠시 지내도록 허락해 줄 테니까!!!!!

 

  MH

  셜록은 어릴 때부터 그랬다네. 일찌감치 포기하는 게 좋겠다고 말하고 싶군. 자네, 정말 전장을 빠져나와 생활할 수 있겠나?

  아, 혹시 이전처럼 생활에 어려움을 느끼게 되거들랑 일전에 말한 조건은 아직 유효하니 언제든 연락하게. 사례는 충분히 하겠네.

 

  Molly Hooper

  그랑 결혼할 수만 있다면 가정부 취급당해도 좋을 거라고 잠시 생각했어요.

  어쩐지 난 당신이 부럽네요.

 

  Sarah Sawyer

  존, 걱정돼서 들렀어요. 많이 아픈가요?



  날짜를 보아하니 어제 쓴 글이었다. 덧글 란에 ‘everybody shut up.......’ 이라고 적던 셜록은 극한의 인내심을 발휘하여 전송 버튼을 누르기 전에 Alt+F4로 창을 꺼버렸다. 어젯밤 셜록이 집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같이 범인의 흔적을 쫒으러 가자고 존에게 말했을 때, 그는 노트북을 앞에 놓고 독수리 타법으로 뭔가를 쓰고 있었다. 이 글이었군. 셜록은 가늘게 뜬 눈으로 존을 노려보았다. 소파에 늘어져 반송장 상태가 된 존은 미동도 없었다. 한참 그를 바라보던 셜록은 무슨 결심을 했는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부엌에서 대공사라도 벌이는 줄만 알 것 같은 요란한 소리가 지나간 후, 셜록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작은 접시와 스푼을 들곤 존의 앞에 와 섰다.

  “존, 일어나보게. 뭐 좀 먹었나.”

  제발 그냥 나 좀 놔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긴 동거 생활에 성자의 나무가 마음속에 한 그루 자란 존은 눈을 뜨고 셜록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가 내민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옥수수 스프라네.”

  이 놀라운 변화에 할 말을 잃은 존은 멍하니 그것을 받아드느라, 얼마 전에 자신이 인스턴트 옥수수 스프 가루를 사왔고 그거 만드는 데는 5분도 안 걸린다는 사실을 깡그리 잊었다. 지금 그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단어는 오직 ‘셜록이 요리를 했다’ 는 것뿐이었다. 놀라운 것은 그뿐이 아니었다.

  “약은 먹었나?”

  존은 더듬거리며 말했다. 

  “아, 아아, 응.” 그는 고개를 끄덕인 셜록이 잘 했군, 하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 자타공인 소시오패스 셜록이 타인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고 관심을 보이다니! 전에는 한 번도 없던 일이다. 어쩌면 어제 말하려다 못한 I'm not your housekeeper를 지금 전한다면 들어줄지도 모른다는 데에까지 생각이 미쳤지만, 논쟁을 벌이기엔 병마와 싸우느라 존이 너 무 지쳐있었다. 존은 혼란스러운 표정을 감추고 묵묵히 옥수수 스프를 마셨다. 꽤 맛이 있었다. (당연히 인스턴트니까 맛이 있는 거겠지만 병마에 지친 존의 머리엔 그런 것까지 생각할 이성이 남아 있지 않았다.) 다 먹은 접시를 내려놓은 존은 “그만 올라가서 쉬게나.” 하는 셜록의 권유에 고개를 끄덕이며 안 아픈 데가 없는 몸을 일으켰다.

  거실 문을 열고 나서며 존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머뭇거리며 말했다.

  “셜록, 음, 지금 우유가 다 떨어졌는데...”

  그러자 셜록은 존을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래? 사다 놓도록 하겠네.”

  어쩌면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뜰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존은 침실로 올라갔다.

 

 

  꿈을 꾸었다. 높아진 열 때문에 눈앞이 가물거렸다. 홀연히 나타난 셜록은 존을 내려다보다가 그 큰 손을 그의 이마에 대었다. 서늘한 감촉이 좋아 존은 그를 붙잡았다. 가지 말라고 말했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셜록은 그의 옆에 앉았다. 그의 체중이 실린 침대 스프링이 기분 좋게 기울어졌다. 이마를 식히던 손은 이번에 목덜미로 내려왔고 존은 그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또 다른 꿈에서 존은 자장가를 들었다.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그것은 특이하게도 바이올린 선율을 닮아 있었다. 어릴 때 들은 적이 있던 모차르트의 자장가였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멜로디가 너무나도 푸근해서 존은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정말 꿈이었을까?

   


  다음날, 열은 내렸지만 남아있는 감기 기운에 멍해진 머리를 긁적이며 거실로 내려오니, 말끔한 차림새의 셜록이 TV를 보다 말고 그에게 인사했다.

   “지금은 좀 어떤가, 존?”

  얼떨떨한 얼굴로 존은 셜록을 보았다. 뭔가 매우- 이상했다. 어젯밤 꿈의 셜록이 너무 다정해서였나. 존은 아직도 꿈의 지배를 받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괘, 괜찮은 것 같네.”

  정말 꿈이 아니었다면 어쩌지. 존은 어색한 상황을 탈피하기 위해 재빨리 부엌으로 향했다. 내렸던 열이 다시 오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얼굴이 붉어졌다. 다행이도 셜록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뭐라도 좀 먹고 출근해야겠다는 생각에 식빵 한 조각을 토스트기에 넣고 마가린을 꺼내려 냉장고를 열었다. 그리고 존은 자신이 아직도 열에 들떠 헛것을 보거나 아니면 꿈을 꾸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냉장고 안에 가득 찬 음식들은 빌어먹을 사람 머리를 보았을 때보다 그를 더욱 더 당황케 했다. 오렌지 주스와 우유, 샐러드용 야채들과, 커다란 햄 조각, 새 마가린통, 여러 가지 드레싱 등등.

  이게 꿈인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저렇게 셜록이 다정하고 상냥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을 이유가 없잖은가.

  “마침 먹을 게 다 떨어졌더군. 필요한 것들을 좀 사왔다네.”

  “셜록.”

  충격에서 겨우 벗어난 존은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 그러니까,”

  셜록의 눈썹이 꿈틀, 했다.

  “고맙...네.”

  별 얘길 다 한다는 듯 셜록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그날 저녁, 존의 블로그에 새 글이 올라왔다.

 

  

 믿겨지지 않아!

 

  놀랍게도 그는 변화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의 생활에 발전이라는 단어를 넣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ps. 먼젓번 글은 비공개로 내렸습니다. 덧글 달아 주신 분들 미안해요.



 

  그리고 그 다음날, 키보드를 부실 기세로 존은 다시 새 글을 올렸다.





 취소! 취소취소!!!

 

 

  어제 적은 글도 내려버렸다. 누군가 읽었을까 부끄러울 지경이다. 발전은 얼어 죽을. 여전히 모든 게 다 엉망진창이고 그는 새로운 사건을 맡아 또다시 히스테리를 부리고 있다. 젠장! somebody help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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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H
  존, 그렇게 세게 키보드를 내리치면 노트북 망가지지 않겠나. 쓸데없는 글은 그만 적고 가서 차나 한 잔 타오게.
 
  John Watson
  난 가정부가 아니라고!

  Harry Watson
  당장 이사 오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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