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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P 2011. 1. 6. 22:00

마셜 :: afterward



  마이크로프트는 셜록이 서재에 오기도 전부터 그곳에 앉아 있었다. 조심스럽게 서재의 문이 열리자 마이크로프트는 무언가를 열심히 쓰다 말고 눈을 들어 그를 보았다. 셜록은 들어가도 되는지 알 수가 없어 손잡이를 잡은 채 멀거니 마이크로프트를 보았다. 마이크로프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길어지자 셜록은 그의 영역에 한 발을 내딛고는 조심스럽게 등 뒤로 문을 닫았다.

  두 칸짜리 창문 새로 그 끝을 둥글게 다듬은 따사로운 햇빛이 쏟아진다. 하늘은 맑았고 정원 벤치에 앉아 산들거리는 바람을 맞으며 책 읽기 좋은 날씨였지만 셜록은 그가 있는 서재에서 나갈 생각은 없었다. 쏟아지는 빛을 피하기 위해 책장 옆 벽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앉아 책을 펼쳤다. 뒤틀린 나무들이 삐걱 소리를 내는 책장에선 오래 묵은 책 먼지 냄새가 났다.

  무너질 것 같은 책 더미 속에서 아무렇게나 빼어든 것이 하필이면 취미에도 없는 시집이었다. 셜록은 무심하게 정 가운데를 펼쳐 금방이라도 삭아 내릴 듯 퇴색된 종이 위에 얹힌 단어들의 나열을 보았다. 찾는 것은 그 안에 없었지만 그래도 일부러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러나 셜록은 마이크로프트가 제게 일말의 눈길도 주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글자를 훑는 눈망울이 머물지 못하고 작게 흔들렸다.

  길디 긴 겨울방학이 끝나고 형이 다시 런던으로 올라가는 날이 가까워 올수록 소년은 말이 없어졌다. 원체 밝은 성격은 아니었지만 방학이 시작되어 마이크로프트가 본가로 돌아왔을 땐 잠시도 그의 곁에서 떨어져 있지 않으려 하더니, 헤어질 때가 되니 제 방에 틀어박혀 불러도 대답하지 않았다. 애석하게도 사춘기 소년의 흔히 있는 변덕은 그의 형에게서 조금의 관심도 이끌어내지 못했다. 더 이상 저를 부르지 않는 목소리에 심술이 난 셜록은 애꿎은 서랍장을 뒤엎고는 그가 있는 서재까지 와 버렸다.

  옛 문호들은 몇 줄의 시로 고상하고 기품 있게 이루어질 수 없는 슬픈 사랑을 노래했지만 소년은 그 문장들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우습게도 그것들은 축약된 화학 기호들 보다도 더 어렵게만 느껴졌다. 사랑 노래에 흥미를 잃고 멍하니 제 형을 바라보다가 행여 그와 눈이 마주칠세라 다시 책 속으로 얼굴을 파묻고 책장을 넘긴다. 자신을 봐달라는 노골적인 표현에도 무심히 마이크로프트는 만년필을 들어 새로운 종이 위에 무언가를 써내려갔다. 형의 긴 손가락이 움직이는 모양새는 셜록이 읽고 있는 시들보다 아름다웠다. 칭찬의 말과 그 강한 손이 함께 종종 자신의 머리카락을 기분 좋게 흐트러트리던 것을 기억해냈다.

  소년은 덜컥 겁이 났다. 지난 며칠간의 철없는 행동들로 인해 형이 다시는 말도 하지 않으려 하면 어쩌지. 만회할 기회도 주지 않고 찾아와버린 불안에 셜록은 넋을 놓고 제 형의 움직임을 쫓았다. 엄청나게 화난 게 분명해. 아니라면 저렇게 거들떠도 안 볼 이유가 없잖아. 미안하다고 말해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데.

  마지막 장의 필기를 끝내고 종이를 모아 가지런히 하며 마이크로프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프링이 튕기듯 셜록은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용기를 잃은 마음은 그를 보지 못하고 몸을 돌려 책장에 시집을 꽂았다. 종이를 둘둘 말아 손에 쥔 마이크로프트는 딴청을 피우는 철없는 동생의 뒷모습을 보았다. 셜록의 마음속에 번져가는 불안을 알았지만 그는 너그러운 형을 연기하고 싶지 않았고 그건 그동안 셜록의 어리광을 받아준 데 대한 반격이라 해도 좋았다. 묵직한 나무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났고 셜록이 이를 악무는 사이 그의 형은 말없이 서재를 나갔다.

  문 밖에서 작별의 인사를 하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망설이는 사이 그는 저만치 멀어졌다. 책장을 더듬던 손이 애타게 서재 손잡이를 잡았다가, 놓았다. 안달 난 셜록은 제 형의 마지막 뒷모습이라도 보기 위해 창가로 달려가 커튼 뒤에 매달리듯 숨었다.

  가방을 들고 걸어 나가는 마이크로프트는 잠시 몸을 틀어 셜록이 있는 서재를 올려다보았다. 셜록은 커튼으로 몸을 숨겼지만 빼꼼이 내민 눈은 용서를 구하려는 듯 그를 피하지 않았다. 햇살은 눈부셨지만 손끝에 닿는 유리의 감촉은 그의 마음처럼 찼다. 멈춘 그의 걸음이 미소도 짓지 않고 소년을 떠나갔다.

  형을 태운 차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돌아선 셜록은 입술을 깨물었다. 텅 빈 서재에서 소년은 형이 결코 자신을 용서하지 않을 거라는 절망감에 휩싸였다. 그가 앉아있던 책상에는 만년필만이 저처럼 홀로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만년필을 손에 꼭 쥐니 방금 전까지 그를 사로잡았던 제 형의 체온이 그를 간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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